사실은 모두가 그렇다
얼마 전 읽은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는 이런 표현이 나온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둘 가운데에는 얇은 막이 존재한다고. 그렇게 너와 내가 다른 사람임을 자각한다고. 살을 맞대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고통에 공감한다고 하지만 고통이란 엄연히 개인에게 주어지는 몫이다. 실존적으로 그 당사자만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설령 누군가의 아픔을 보고 아파한다고 해도 그건 '내가 아픈'거지, '네 고통을 대신 느끼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얇은 막에 조그만 구멍이 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서로가 사랑할 때다. 물론 너와 나는 다른 사람이지만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데 뒤엉킬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같은 감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감정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두 감정이 공명을 일으킨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외로움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얇은 막 앞에서 느끼는 고통이다. 내가 고작 '내' 안에 갇혀서 다른 사람과 한데 어울릴 수 없다는, 그런 당연한 자각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어떤 날은 정말 뼈에 사무치게 외로울 때가 있다. 이는 물리적으로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의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군중 속에서도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다. 오히려 이쪽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졌는데 목마름을 느끼는 것과 같으니까.
사실 외로움에는 종류가 많다. 혼자 텅 빈 방 안에 앉아 그 심장을 죄어오는 고요함에 고독할 때도 있고, 떠들썩한 술자리에서 충분히 어울리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도 있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을 때의 감정도 있다. 성격이 내향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다른 사람을 갈망한다.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래서 외로움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감정, 혹은 감각이다. 마치 배고픔이나 피곤함을 궁극적으로 없애는 게 불가능하듯이. 다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해소할 뿐이다. 관계 의외의 일에 몰두하거나, 알코올로 말초신경을 끊어버리거나, 왁자지껄한 파티에 참석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만 의외로 효과가 좋은 건 그냥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그것도 엄청나게. 나라고 특별하지 않다. 하긴 외로움이 없었다면 이 모든 관계, 나아가 사회는 만들어지지 못했겠지.
난 외롭다. 누구나 그렇다. 괴롭지는 않다. 연인과 앉아 있는 저 사람도, 술자리에서 가장 시끄럽게 떠드는 저 사람도, 방 안에 틀어박혀 덕질을 하는 저 사람도 외롭다. 너도, 나도 마찬가지다. 이는 묘한 동질감마저 들게 만든다. 서로가 가진 그 얇은 막에 조금씩 흠집을 내고 나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외로우니까. 그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떠안은 숙명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