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선에는 알맞은 속도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달리기에 대한 찬사를 밝혔다면 나에게는 걷기가 그러하다. 보통 버스를 타거나 공유 자전거를 타고 퇴근을 하는데 오늘따라 유독 주변에 남은 자전거가 없다. 집까지 얼마나 걸리나 찍어보니 한 시간이 조금 넘는다. 걸어갈만하다. 바람도 불고, 미세먼지도 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신발끈을 조인다. 이런 여유가 참으로 좋다.
자동차에 비하면 자전거도 꽤나 천천히 달린다고 생각했는데 걷는 데 비할 바는 아니다. 아카시아 향이 아득하게 펼쳐져 나오는 길을 걷는다. 물이 휘돌아 치는 소리도 귀를 때린다. 자동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지난 기억이 재생된다. 정말 이러다 세상 끝까지 걷게 되는 건 아닐까, 이런 착각이 들만큼 길었던 그 길. 한 달 넘게 걸었던 그 길을 자동차로 가면 아마 하루면 해치울 수 있으리라.
여행을 할 때도 보통 도보를 선호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랜드마크를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지만 내 눈과 귀는 실은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골목과 우연에 더 주목한다. 랜드마크란 그 과정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핑곗거리에 불과하다. 마치 그곳에 사는 주민 인양 여행객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 현지인이 프리스비를 던지며 여유를 만끽하거나, 동네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그런 '여행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장면을 수집하기 위해. 기대를 잔뜩 품고 찾아간 관광지보다 차라리 일상적인 풍경이 더 기억에 진득하게 자리한다.
걷는 건 참 정직하다. 한 걸음에 딱 그 분량만큼의 거리만을 좁힐 수 있다. 그리고 내 주변도 딱 그 속도에 맞춰 변화한다. 때로는 걸어야, 아니 아예 멈춰야 보이는 게 있다. 꽃이 피어나는 장면이나 별의 움직임을 보려면 멈추다 못해 아예 기다려야 한다. 모든 시선은 저마다에 맞는 속도가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느린 게 좋다는 건 아니다. 눈이 돌아갈 만큼 빠른 장면에서도 순수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까. 다만 사람의 몸과 마음에는 걷는 정도의 속도가 가장 어울린다. 그보다 빠르면 경계심을 품게 되고, 더 느리면 답답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에 가면 '철학자의 길'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돌길을 마주하게 된다. 생각보다 경사가 꽤 있어서 여기를 걷고 어떻게 사색을 할까 싶다가도, 실은 그 길이 제공하는 고요함과 풀내음에 한껏 생각에 잠기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길 양 옆으로는 이끼를 소담하게 품은 돌담이 이어진다. 조그마한 계곡을 걷는 듯 포근하게 품어주는 느낌이다. 실은 철학을 핑계로 그저 마냥 걷고 싶었던 건 아닐까. 언젠가 아무런 기대도 없이 끝까지 걷기 위해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