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불편함'이 '내'가 될 순 없으니

누군가에겐 한없이 불편할 이야기

by 신거니

나이를 먹어가며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동시에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사실 하나는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실로 진부한 문장이다. 물론 이 자체가 절대적 진리는 아닌지라 분명 누군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서 금세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 문장을 이렇게 수정해보자. '사람은 대체로 잘 바뀌지 않는다'


최근 들어 느낀 건 사람은 대체로 잘 변화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변화를 경계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편견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면 안전핀을 뽑고 소화기를 뿌려댄다. 설령 상대방의 변화하는 모습이 어떠한 의도도 품지 않을 때조차 마찬가지다. 그저 다르다는 이유로 그 '다름'은 쉽사리 '틀림'으로 변모한다. 다름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틀림은 주관적 평가다. 객관의 세계에서 주관의 세계로 넘어올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현실에서 팩트는 자연스레 가치로, 또 가치는 팩트로 분장하기 때문이다.


퇴사를 한 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단순히 퇴사자 입장에서 행동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자기변호를 해야 했던가. 대(大)퇴사시대라지만 퇴사자는 여전히 소수다. 소수자는 항상 자신의 상황과 정체성에 대한 명료한 주석을 요구받는다. 주장은 어디에서 근거했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청사진도 제시해야 한다. 일전에 한 라이브 영상에 나가 회사를 다닐 때의 장점을 "남에게 일일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게 바로 그런 경우다.


만약 연필 수집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수집가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는다. 연필을 종류별로, 또는 원재료별로 모으는 행위 자체가 어떤 가치관도 심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보통 남의 이야기가 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를 따진다. 그 사람의 경험, 생각, 가치관이 내가 가진 그것과 대치할 때 날을 세우기 마련이다.


특별히 공격적인 주장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공격성'은 주장을 접한 사람이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문제이지 객관적인 팩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옳음과 틀림'의 천칭이 이리저리 기울게 되는 순간이다. 이때 다수자가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건, 다수로서의 권력구조와 더불어 이미 풍성하게 놓인 근거 덕분이다.


사회 시스템과 문화는 보통 다수의 결을 따라 형성된다. 이런 차원에서 '퇴사를 해야 할 근거'란 보통 괴짜의 칭얼거림 정도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혹은 '그래,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어차피 현실이 이러이러하니 어쩔 수는 없고 그대로 따라야지 뭐 어쩌겠어. 모든 사람이 너같이 살 수는 없잖아'라는 핀잔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조차 다수의 입장에서는 '공격적인 불평불만'으로 치부된다. 이미 굳어버린 기성의 질서를 강요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순응'이지만 말이다.


아, 앞서 쓴 문장은 그 자체로 얼마나 '공격적'인가. 또 얼마나 속 좁은 의식의 발로인가. 관용과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퇴사자인 내가 이미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이에게 어떤 관용과 배려를 베풀 수 있을지 조금 헷갈릴 뿐이다.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다름을 인정할 것,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가치관 중 하나다. 나조차도 가끔씩 잊어버리긴 하지만 결국엔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걸 배운다. 사람은 대체로 잘 변하지 않으니까.


다만 내가 가진 다름을 불편해하며 받아주지 않는 이에게조차 계속해서 뭔가를 내보여야 하냐고 묻는다면, 사실 반반이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나라는 사람을 억누를 필요는 없다. 그게 실제적인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들을 의지도, 여유도 없는 이에게 계속 쏘아붙이듯 뭔가를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동시에 인지하고 있다. 이는 무기력한, 혹은 냉소적인 포기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각자가 가진 가치관에 따라 다른 입장을 보인다. 그 수많은 의견의 차이를 굳이 좁힐 이유가, 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싶다. 담론을 한 방향으로 모아야 할 간절한 필요성이 없다면 말이다. 어차피 난 모든 사람을 설득할 수 없고, 또 어쩌면 그래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내가 전적으로 맞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다만 단순히 앞서 언급한 이유만으로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는 것 또한 옳지 않다. 사람은 모두가 자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자신 안에 갇혀 스스로를 옳다고 믿는, 그러나 현실에서 그 수많은 '옳음'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가진 다른 정체성, 다른 생각, 다른 행동, 다른 말이 누군가에게 일말의 불편함을 준다면 조금은 숙고를 해보자. 이는 그 사람에 대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나에 대한 배려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모습을 내보이며 불필요한 불편을 겪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나을 수 있으니까. 물론 필요한 시점에는 필요한 말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눈치를 보며 자기 검열을 할 생각은 없다. 사람은 타인에게 놀라우리만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가를 생각해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겠지만 그 '피해'가 '마음에 묻어나는 일말의 불편함' 정도라면 굳이 뭔가를 감추고 싶지는 않다. 이제 노골적인 조롱과, 차이에서 오는 불편함을 구분할 정도의 시기는 되었다.


누군가가 내 말이나 생각에 반박하며 불편함을 표시한다면 우선은 잘 들어보겠다. 다만 그 불편함이 감정적인 충동이나 비합리적인 편견에서 온다면 내 마음에 받아들이기 전에 보류해두겠다. 합리적이라면 받아들이고 나를 변화시키는 게 낫다. 그 정도의 여유는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만약 올바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면 바뀌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그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을 바꾸는 건 팔 할이 불편함이다. 다른 이가 나름의 용기를 내어 야기하는 불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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