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나온 건 용감해서가 아니야

내겐 그냥 당연한 일이었거든

by 신거니

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다. 그는 콘텐츠 미디어 스타트업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 놀랍도록 얘기가 잘 통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건 비단 '언어능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삶의 토양이 있어야 한다. 그 단단한 기반 위에 하나씩 새로움을 쌓아 올리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대화의 이미지다.


그래서 피상적인 관계에서는 피상적인 대화만 오간다. 날씨 얘기, 여행 얘기, 그리고 MBTI 얘기.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에는 이만한 게 없으나 보통은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 꼭 철학적으로 깊은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진중하게 대화할 수 있다. 오늘도 그러했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인들과도 그러하다. 그래서 내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대화다. 말이 잘 통하지 않고 툭툭 끊기면 집에 가고 싶다는 메들리만 무한 반복된다.


오래간만에 만났음에도 그와의 대화는 흥미롭게 널을 뛴다. 그리고 몇 가지 지점에서는 합의에 이르렀다. 하나, 앞으로 콘텐츠든 뭐든 자신의 손으로 생산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둘, NFT나 메타버스, 암호화폐, 증강현실 및 가상현실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시장성 있는 트렌드로 자리 잡을 것이다. 셋,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고 거기에 올라타지 못하면 어떤 일이든 하기가 어렵다. 사실은 같은 얘기다. 세상은 최근 들어 더 빠르게 변하고, 모두에게 다르게 살 것을 주문한다.


다른 삶의 영역에서 살아왔음에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경각심을 준다. 사회 곳곳에서 이미 변화의 시그널이 감지되고 있다는 거니까. 송길영 부사장은 '가까운 미래에는 플랫폼 제공자가 되거나 혹은 콘텐츠 창작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알파 세대는 메타버스 세상에서 NFT와 암호화폐를 통해 돈을 벌고 있다. 지금의 어린 세대는 이미 디지털 디바이스는 물론이고 그 안의 플랫폼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룬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한 탓이다. 산업은 점차로 플랫폼 기업, 빅 테크 기업, 콘텐츠 기업 위주로 재편된다. 한국이 최근 들어 가장 강세를 보이고 있는 분야는 K-pop이나 K-드라마를 필두로 한 콘텐츠 사업이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비대면 문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자리 잡았고, '일상 회복'의 흐름에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질 전망이다.


퇴사를 하든 이직을 하든 회사에 다니든 프리랜서로 일하든 사업을 하든 백수로 살든 일의 형태는 점차로 다양해진다. 책 <일하는 마음>이나 <인디펜던트 워커>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하는 신인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들은 저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한다. 그것도 자기 손으로 직접. 종이책, 전자책, 유튜브 영상, SNS 피드, 브런치 포스팅, 블로그, 컨설팅, 스타트업 등 형식은 천차만별이다.


스마트폰과 결합된 새로운 인간군상을 다룬 책 <포노 사피엔스>가 2019년에 나왔는데 이제는 '모바일 세상이 왔다'는 말조차도 식상할 지경이다. 이미 스마트폰은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끊임없이 콘텐츠가 나온다. 항상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도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일에는 꽤 많은 시간을 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뭘까? 먼저 세상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 어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변화에 올라탄 기업에 투자라도 할 수 있으니까. 메타버스, NFT, 암호화폐, 가상현실은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 내에는 상식이 될 수 있는 기술이다. 디바이스 차원이든 플랫폼 및 소프트웨어 차원이든 실제로 써보고,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플랫폼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콘텐츠를 열심히 쌓아야 한다. 그것도 양질의 콘텐츠를.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인 성공을 그저 한국의 국위선양 정도로만 소비해서는 곤란하다. 이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전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잘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의 눈은 점점 높아진다. 몇 년만 지나도 아이돌의 뮤직 비디오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계속 존속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설령 정년을 보장받는 철밥통이라고 해도 '나의 것'이 없는 상황에서 기나긴 은퇴 후 인생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행동하게 됐다. 회사를 나왔고, 콘텐츠 창작에 진심인 사람들과 합류해 뭔가를 만들어내고 있고, 내 사업과 브랜드를 계획하고 있다. 이건 내가 특별히 대단하거나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저 앞서 언급한 현실에 대한 가장 최적화된 전략을 따른 것이다. 꼭 사업을 하지는 않더라도 '내 일'을 해야 한다. 일의 형태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이제 기존의 구분선은 사라질 예정이다. 유연하게 변화에 대처하고 성실한 사람만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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