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보통 생각하는 그런 학교는 아니다.
예전부터 난 학교를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라 성인들이 모여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곳. 이미 학창 시절을 뒤편으로 떠나보냈음에도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하는, 또 배워야 하는 이들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정작 필요한 건 기성 교육기관에서 가르쳐주지 않음을 알아서다. 물론 정확히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가 있다. 나의 '꿈'도 실은 여기에서 모티프를 얻었다.
학교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다가오는 건 기존 교육의 폐쇄성에서 기인한다. 사방에 입시라는 높은 담을 둘러치고 그 안에 발을 내디딘 사람에게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전에는 얼마든지 핑계를 댈 수 있다. 수업은 어쨌든 제한된 크기의 강의실에서 제한된 수의 교직원에 의해 이루어졌으니까.
하지만 온라인 시대가 도래한 이후 교육 서비스는 이제 무한하게 복제가 가능한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기존처럼 더 높은 학업성취도를 가진 사람이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물론 오프라인 교육을 해야 더 집중적인 관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여전히 교실 담장을 높이고 폐쇄적으로 운영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타의 재화와 서비스는 대개 가격으로 진입장벽을 쌓는다. (물론 몇몇 명품이나 스포츠카 라인에서는 이른바 'VIP 회원'들에게만 특정 제품을 제공하긴 하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다.) 그런데 유독 교육 서비스만큼은 입시제도 등을 통해 구매자를 제한한다. 온라인 교육의 활성화로 교실에서 제공되는 건 이제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단순히 모든 오프라인 교육을 온라인으로 돌리자는 말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다만 내가 원하는 그림은 단순히 '서울대 강의를 모두에게' 같은 정치적인 구호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교육 콘텐츠를 제공할 일종의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 이런 플랫폼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학교'다. 때로는 인문학의 관점에서, 때로는 예술의 관점에서, 때로는 사회과학의 관점에서 인생을 논하는, 그런 학교.
이쪽 영역은 현재 무주공산이다. 파편화된 서비스는 존재하나 통합적인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원데이 클래스'는 여타의 플랫폼을 통해 제공되고 있으나 제대로 된 커리큘럼은 없다. 그리고 커리큘럼이 잘 갖춰진 기관들은 앞서 언급한 여러 제도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서비스를 공급한다. 스포츠카를 전 국민이 타지 못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거나 사회적으로 비용이 발생하는 건 아니다. 교육은 다르다. 제대로 된 교육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 과정에서 배제된다면 손해다.
내가 학교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하나 더 있다. 사실 학교뿐만 아니라 앞으로 시작할 모든 사업도 마찬가지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학자와 예술가가 비빌 수 있는 최소한의 언덕을 세우고 싶다. 기성의 체계가 미처 품지 못한 사람의 머리 위에 우산을 하나 놓아주고 싶다.
세상이 제시하는 정답을 따르지 않고 본인만의 길을 가는 사람을 철학자, 그리고 예술가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영적인(Spiritual) 구도자다. 기성의 체계가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자신의 내면을 따른 사람이다. 물론 이런 구도자들은 가시밭길을 걷는다. 쉽사리 이해받지 못한다. 그리고 대개 경제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존에 있는 직장에 들어가지만 괴롭다. 하지만 막상 뛰쳐나오기에는 대책이 없다.
가끔씩 언급하는 '삶의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존 회사에 남아있기에는 괴롭고, 그렇다고 나오기엔 배고프다. 그럼 이들이 몸을 뉘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건 그들도, 또 나도 구원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운이 좋아 지금의 회사에 잠시 의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내 사명이란 개인적으로는 '나답고 충만하게 살 것',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삶의 대안을 만들고 사람을 도울 것'이다. 특별히 이타적이라서 라기보다는 그게 내가 받은 행운을 조금이라도 갚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래야 마음도 편하다. 성공과 실패를 자신의 능력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 건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에 이르게 만들어 준다.
특히나 철학자와 예술가에겐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일종의 후원자가 절실하다. 사실 후원자라고 하면 조금 오만하다. 그저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이상을 바라보고 동행할 수 있는 동료라고 해두자. 사실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을 모으고, 또 만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또 학교를 세우고 싶다. 누군가에겐 설령 친구가 있더라도, 또 가족이 있더라도 지독하게 외로운, 그런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외-내향성과는 상관이 없다. 그저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영적인 자아가 머물 곳을 찾지 못한 탓이다.
영적인 자아는 종교나 기성 체계와는 결을 달리한다. 철저히 주관의 세계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한다. 마치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이는 차라리 한(恨)이다. 의미의 허기이자 갈증이다. 그래서 이런 욕구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체계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어떻게 보면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꿈틀거리면 왜 이리 유난이냐며 핀잔도 듣는다. 사방에서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페르소나를 쓴다면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만 내면엔 흉터가 잔뜩 남는다.
한을 품은 귀신이 무당에게 빙의하듯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의 오아시스를 하나 만들고 싶다. 사실 그게 꼭 '학교'가 아니어도 좋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게 공방이든, 스타트업이든, 협동조합이든 간에. 중요한 건 구심점이다. 멀리서 보고서도 찾아올 수 있게끔 깃발이라도 높이 달아보자. 깃발이 펄럭이는 장면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하다. 어쩌면 거기에 걸려 나부끼는 게 이상이어서? 지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하나의 가치가 천상에 달려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