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 우화의 또 다른 교훈
엄마 말을 지지리도 안 듣던 청개구리. 강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은 충실히 따랐다가 무덤이 떠내려가고 만다. 구슬프게 운다. 개굴개굴. 뼈저리게 느낀다. 아,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어야 했는데. 이 이야기의 교훈도 그런 줄만 알았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자.
여기서 [부모님]을 [선생님, 직상상사, 선배, 배우자, 애인]으로 바꿔보자.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해라. 그렇지 않았다간 대참사가 일어난다. 집단주의, 특히 수직적 집단주의는 순종이라는 덕목을 중시 여긴다. 모난 돌은 정을 맞다 못해 가루가 된다. 청개구리로 살지 마라. 아주 혼나는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청개구리 우화를 삐딱하게 바라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청개구리에게 부족한 건 순종이 아니라 일관성이었다. 그대로 계속 반대로만 행동했다면 무덤은 무사했을 텐데. 양지바른 곳에 잘 모셔드렸겠지. 마지막에 가서 청개구리는 자기임을 포기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불쌍한 청개구리. 왜 그랬어.
난 뱃속에 청개구리 한 마리를 키우고 산다. 누군가 나를 찍어 누를 때마다 천천히 올라온다. 모두가 맞다 맞다 하면서 박수를 칠 때도 기어 나온다. 왜? 왜 그래야 하지?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대개 허락받지 못한다. 조직 분위기라는 게 있고, 위계질서라는 게 있고, 정답이라는 게 있으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이 청개구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면? 온 세상이 뒤집어진다. 한없이 하찮아보이던 나의 존재가 모두의 주목을 받는 순간이다. 피라미드처럼 잘 짜인 조직이라면 내리 갈굼의 향연이 펼쳐진다. '평소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저런 말이 나옵니까?' 집단의 목소리로 한 사람을 누르는 건 일도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비교적 평등한 사이라도.
미친 척하고 반항하면 어떨까? 약간의 통쾌함은 있지만 후폭풍이 너무 크다. 세상은 도른자에겐 몽둥이를 아끼지 않는다. 왜 그랬냐며 추궁당하는 건 기본이다. 이렇게 보면 '왜'라는 질문은 대개 취조를 할 때 등장한다.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느낌. 이래서 허락받지 못했구나 싶다.
결국 청개구리를 안전하게 방목할 나만의 들판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공간. 얄궂지만 그런 시도조차 보통 저지당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청개구리 금지법이라도 제정된 걸까. 퇴사, 나를 찾아 떠나는 세계여행, 창업, 프리랜서 선언, 자퇴 등등 제도권 밖의 인생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게 갖은 반대에 부딪히면 확신한다. 아, 이 길이구나. 좋은지 안 좋은지는 아직 판단이 서질 않는다. 좋고 나쁘고는 결과에 달려있다. 반면 옳고 그름은 과정에 달렸다.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면 과정이라도 나답게 꾸려보는 건 어떨까? 아무도 막아서지 않는 길에는 내가 없다. '내'가 없기에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조금이라도 나를 내세운다면? 금방 통행금지 표지판을 마주하게 된다.
나다움은 쟁취해야 하는 그 무언가다. 때로는 싸가지가 없어야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나지막이 으르렁거려야 한다. 세상의 필요에만 맞추다 보면 나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나답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욕망이 왜곡된 방향으로 분출되기 전에 김을 미리 빼두자. 매번 고개를 숙이다 갑자기 급발진하면 황당할 뿐이다. 나다움에도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다.
왜 그렇게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듣냐고 하면 묘하게 반갑다. 잘 살고 있구나 싶어서. 퇴사는 절대 하지 말라구요? 말해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