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게

아직은 발버둥 치고 있다

by 신거니

나는 내 세상의 전부이면서 동시에 감옥이다.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내가 '나'라서 겪어야만 하는 생물학적,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제약을 포함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1999)는 찌질한 인형술사 크레이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크레이그는 우연히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그 자신이 분한)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의 통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존 말코비치로 살아간다. 그가 얻은 건 말코비치의 자아, 명성, 인기, 외모, 재산 등이다. 그렇게 크레이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좋든 싫든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식의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나'로 지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나'에게 여러 가지 의무와 제약을 부과한다. 이런 제약은 내 정체성에 부여되기도 하고, 내 경제적 상황에 부여되기도 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을 때 괴롭지만, 동시에 나로 살아야 하는 운명 탓에 답답하기도 하다.


그래서 보통은 이 운명 앞에서 순응하거나, 혹은 어떻게든 뭔가를 얻으려 발버둥 친다. 난 자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정치적, 이념적 의미로서의 자유라기보다는 '나로부터의 자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유롭기 위해 부스럭거린다. 반대로 자유 없이 뭔가를 있는 그대로 맞아야 하는 상황에는 금방 화가 난다. 아직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나 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내가 모든 걸 이룰 수는 없다는 조그마한 깨달음 또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실패를 하고도 '어쩔 수 없지'라며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다. 실은 포기가 너무 빨라서 문제인 부분도 있다. 미련을 갖고 집착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공을 들여야 이루어지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집착과 노력을 가르는 기준은 뭘까? 열정과 아집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아직은 답이 없다.


요즘엔 가능하면 안 되는 무언가를 오래 붙들고 있지는 않으려 한다. 계속 다른 방향으로 시도하고, 대안을 찾는다. 처음엔 한 사람만을 짝사랑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좋은 이들도 많았다는, 그런 종류의 클리셰다. 세상은 넓고 선택지는 많다. 물론 어느 순간엔가는 한 지점만을 파고들어야 할 시기가 온다. 그때가 언제인지, 혹은 오기는 하는 건지 일러주는 이는 없다. 자기가 찾아야 한다.


석유를 시추할 장소를 찾으려면 여기저기 찔러봐야 한다. 취업에 성공하려면 수많은 입사지원서를 넣어야 한다. 시도, 실패, 실패, 그리고 실패. 그런데 사실 과정에 충실하면 후회가 없다. 난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리고 성공확률도 올라간다. 이래저래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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