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의식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
꿈에서 지금의 내 '현실'이 꿈임을 깨닫는 순간 금방 깨고 만다. 돈만 추구하다 보면 돈에서 점점 멀어진다. 어쩌면 행복도 마찬가지다. 무지개를 향해 돌진하면 도리어 그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디테일을 놓치는 것처럼. 그래서 행복이란 자고로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처럼 다루어야 한다. 맛깔나는 통조림 한 캔을 까놓고 무심하게 기다린다. 그럼 슬쩍 다가와서 골골송을 선사할 수도 있다. 물론 발톱을 한껏 세우고 달려들 수도 있지만 말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과학자의 대답은 비교적 심플하다. 사람의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호르몬, 혹은 신경전달물질이 나오는데 이게 행복감, 쾌감에 관여한다. 그래서 연인과 사랑을 나누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즐거운 영화를 보면 도파민 파티가 일어난다. 한편 항우울제에 자주 사용되는 세로토닌이라는 물질도 있다. 프로작으로 잘 알려진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실제로 우울감이 줄어들고 행복감이 증가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들으면 어쩐지 사람이 그저 기계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어떤 호르몬이 나오면 이런 기분이 들고, 저런 호르몬이 나오면 다른 기분이 든다. 그저 모든 걸 호르몬 때문이라고 하기엔 나 역시 자아를 가진 인간이 아닌가?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호르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 자의식을 보유한 인간으로서.
오늘 하루는 정말 행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에어컨을 켜고 좋아하는 초밥을 잔뜩 먹고,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영화를 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창밖으로 바라보며 누우니 천국이 여기구나 싶다. 항상 불안감에 뭔가를 이것저것 하는 스타일인데 자신을 조금 내려놓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 좋다.
비록 스스로 선택했고, 또 꽤나 즐기고 있기는 하지만 최근 나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괴롭지는 않다. 지금은 불안감을 동력 삼아서라도 앞으로 달려야 할 시기이고, 또 그 과정이 나쁘지 않다. 하루를 꽉 채워서 한껏 뿌듯하게 보내고 나면 자존감도 쑥쑥 올라간다. 난 최선을 다 했으니까.
다만 이 모든 노력이 하나의 자기 착취는 아닐까? 또 다른 불안감이 고개를 쳐든다. 미국의 유명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에 관한 영상을 보고 나서 더 그렇다. 앤서니 보데인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수많은 이들을 만나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2018년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수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험 추구형 인간'이다. 물질적 만족감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되는 시대, 이제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었다. 현대사회의 명령은 단순하다. '더 소비하라, 경험을.' 명품 가방을 사는 건 '명품을 사용하는 경험'을 사는 행위다. 이는 수많은 브랜드와 여행지가 내세우는 모토이기도 하다. 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경험을 사라. 더 많은 경험,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관계를 소유하라. 아예 그 모든 걸 진열할 소셜 미디어라는 공간도 떡 하니 마련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맛집 앞에 줄을 선다. 애플 신제품이 나오면 얼리버드로 구입한다. 매년 해외여행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 각종 모임과 동호회를 하고 하다못해 집구석에서 OTT 콘텐츠라도 잔뜩 소비한다. 세상은 넓고 경험할 건 많다. 더 경험하라. 더 많은 경험을 소유하고 진열하라. 그 가상의 트로피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고개를 당당히 들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어쩐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다. 왜 경험을 다양하게 해야 할까? 이는 도덕적인 정언 명령이 아니다. 경험의 유무는 선악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시대정신이 규정하는 '좋고 나쁨'의 영역에 들어간다. 그리고 좋고 나쁨은 다분히 행복과 연결되어 있다. 더 많은 경험은 좋다. 즉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삶을 더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니까.
물론 맞는 말이다. 다만 그 반대쪽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해외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고 하면 주변에서는 믿기 힘들다는 눈길을 보낸다. 지난 세월의 가치가 해외여행의 유무로 갈리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특별히 불행했을까? 아마 딱 주변 사람들만큼 행복하고, 또 불행하지 않았을까? 국내여행, 또는 집에서 읽은 책 한 구절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충분하지 않나?
행복은 아무리 포장해도 실은 도파민이나 세로토닌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도파민은 눈앞에 있는 경험이 해외여행이든 국내여행이든 고양이 한 마리든 상관하지 않는다. 행복감을 느낄 상황이 되면 도파민이 분비된다. 그리고 곧 사그라든다. 여기에 중독되면 더 큰 자극을 찾는다. 결국 세상 그 자체를 들이켤 만큼 수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이는 대개 좋지 않은 결말로 이어진다. 복권 당첨자는 당첨 전보다 행복감이 줄어든다고 한다. 세상만사가 시시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시함 그리고 지루함. 이는 매우 위험한 신호다. 그리고 불시에 찾아온다. 삶의 디테일에 감탄할 수 없는 사람은 제아무리 대단한 걸 들이대도 시큰둥하다.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일명 '아저씨 그룹'과 '아줌마 그룹'을 마주치게 된다. 아주머니들은 매사에 감탄의 연속이다. 꽃도 예쁘고, 물도 예쁘고, 고양이가 예쁘고, 하다못해 지붕이 아기자기하다고 야단법석이다.
반면 아저씨들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시니컬하다. 이건 저번에 갔던 여행지에 비하면 별거 아니네, 별 맛도 없네 이런 식이다. 물론 아닌 분들도 많지만 경험상으로는 그렇다.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를 볼 때면 삶이 얼마나 무료하고 공허할까 하는 생각에 멈칫하게 된다. 사람은 감동하기 위해 산다. 매사에 감동할 수는 없겠지만 문턱이 너무 높으면 살기가 어렵다. 모든 게 시시하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큰 어쩌고'나 '세상에서 가장 비싼 어쩌고' 같은 타이틀에 목을 맨다.
책 <그리스인 조르바>는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할 수 있음을, 거기엔 별다른 요건이 필요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내가 춤을 출 수 있다면 여기가 나의 무대이고, 내가 마시는 술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내 연인이 가장 사랑스럽다. 행복의 근거를 어딘가에서 주석처럼 끌어와 덕지덕지 붙여야 한다면 그건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행복에서도 서서히 멀어진다. 감탄이란 사소한 무언가에 바치는 찬가이다. 대단함이란 오히려 사소할 수 있다. 빈둥거림에 축복을! 정말 아름다운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