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워지고 채워져야 비우고 또 비워야 채워지고
웹툰 <커피우유신화>의 주인공 리하이는 다소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생에서 과할 만큼 평범함을 추구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행복이나 성취를 너무 한 번에 얻으면 남은 인생이 비참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점진적으로 나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모든 걸 얻은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냥 신을 생각해보자. 뭐든지 할 수 있고, 영원히 존재하고 어쩌고 하는 절대성을 취득한 존재다. 이 존재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갈까. 모르긴 몰라도 아주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까. 더 이상 추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 그래서 무한한 신이 유한한 인간을 부러워하는 식의 플롯을 여러 작품을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는 비단 그 콘텐츠를 만들어낸 게 '인간'이라서라기 보다는 절대성의 허무함, 나아가 결핍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보통은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한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정언명령('더 많이 소유하라')에 따르면 말도 안 되는 논리다. 보통은 '가지지 못해도 괜찮다' 정도의 스탠스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가지지 못함에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1. 결핍은 동기부여의 원천이 된다.
잔에 물을 채우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꽉 찬 물류창고에 물건을 더 넣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이룬 이는 그래서 비참한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채운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려우니까. 그래서 의도적으로라도 비울 필요가 있다.
자유가 결핍되어야 자유를 갈망한다. 돈이 부족해야 돈을 갈망한다. 행복하지 않아야 행복을 갈망한다. 지나친 집착은 삶에 좋지 않지만 적당한 결핍감은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내가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운동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얻지 못한 무언가가 있어서다. 사람에게 꼭 꿈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목표는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분명하게 나아갈 방향을 정해주기 때문이다. 잠깐 헤맬 순 있어도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결국 인생의 만족감도 결핍의 충족에서 온다. 뭔가가 충족되려면 결핍되어야 한다. 인생의 의미도, 행복도, 살만하다는 그 감각도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인생을 망가뜨리면 안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 느끼고 있는 결핍감을 도끼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아직은 채울 게 남았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모든 걸 얻은 존재는 그 어떤 것도 새로이 얻을 수 없다.
2. 결핍은 불필요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만들어준다.
미니멀리즘 사상과 맞닿아 있는 이유다. 사람들은 보통 가질수록 행복하다고 믿는다. 알맞은 지점까지는 맞는 말이다. 다만 일정한 수치를 넘어서면 괴로움이 시작된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면 편하지만 또 다른 번거로움을 수반한다. 결혼도, 연애도, 승진도, 사업도, 성취도 마찬가지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때는 부러워 보이는 이들도 실은 지독한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그 성취의 크기만큼 자의식이 강해지고, 불안감도 커진다. 남은 인생이 내리막길의 연속일까 봐.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현재 자신의 위치(성취와 결핍을 포함한)에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란 도덕적인 명제이기 이전에 삶을 긍정할 수 있는 꽤 효과적인 처방전이다.
실은 얼마 전까지 내가 이루지 못한,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떠올리자니 힘들어졌다. 난 왜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거지? 난 왜 별다른 성취가 없지? 등등. 부정적인 상념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반쯤은 내 안 깊숙이 자리한 이놈의 '결벽증' 때문이기도 하면서(언젠가 얘기할 기회가 있을 중요한 특성이다), 또한 감사하지 않는 오만한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실은 못난 마음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려면 가진 것에만 감사할 게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채워진 공간만큼이나 빈 공간에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실제로 기분이 꽤나 좋아졌다. 정신승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경지다. 우선은 이 마음을 안고 살아가련다. 아직은 채울 게 많이 남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