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나고 싶지 않다면 괴로워야 한다
얼마 전 캐리비안 베이를 다녀왔다. 해골바가지에서 쏟아지는 물도 얻어맞고, 유수풀에서 신선놀음을 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캐리비안 베이의 백미는 파도풀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깊은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다소 둔탁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인공 파도가 저편에서 다가온다. 그러면 기분 좋은 비명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몸이 출렁이는 재밌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몇 번이고 파도를 맞다 보니 이제는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코로나를 잊은 듯 수많은 이들이 첨벙거리며 다음 파도를 기다린다. 묘한 기분이 든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돈이 많든 적든, 키가 크든 작든 하나같이 들뜬 얼굴로 물에 떠있다. 언뜻 그들이, 아니 나를 포함한 모두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공통의 경험은 생면부지의 타인과 일체감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연결이 되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하나로 합쳐진 기분이다. 물론 나는 내 몸뚱이를 안고서 파도의 스릴감을 온전히 즐기지만 옆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야릇한 안도감과 함께 편안해진다. 집단에 섞인다는 건 그런 것이다.
동시에 집단은 가장 큰 괴로움을 안겨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소위 '일진'들이 권력을 쥐는 건 물리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교 혹은 또래 집단이라는 무리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타의 학생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들의 지위를 묵인하기 때문이다. 군대의 선임도 마찬가지고, 직장의 상사도 마찬가지다. 후자의 경우에는 명문화된 계급 혹은 직위가 그러한 권력 구도를 정당화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집단 내에서의 권력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집단을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끄는 목자가 되기보다는 따르는 양이 되고싶어 한다. 설령 불이익을 누린다고 해도 동시에 막중한 책임에서도 벗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권력을 가지고 다른 구성원에게 폭정(?)을 일삼던 녀석이 다른 개체에 비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한다. 누군가 언제든 자기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해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집단에서 온전히 벗어나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어느 집단에 속하여 삶을 누릴 것인가는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내가 나에게 부여해야 하는 자유다. 군대와 같이 강제적으로 몸을 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회사도, 또래집단도, 심지어 가족도 실은 선택 가능한 하나의 집단이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관계라면 설령 혈연이라고 해도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괴로움이란 집착에서 온다. 집착은 자유, 그리고 상상력의 부재에서 온다. 그리고 그 결핍만큼의 핑곗거리를 잔뜩 만들어 자신의 앞에 늘어놓는다. 그건 자신의 선택이다. 그게 더 마음 편하다면 괴로워하면 된다.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느끼는 건, 누군가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는, 그 뻔한 사실이다. 당장 나부터 그러니까. 그래서 함부로 조언하거나 충고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저 이런 길도 있음을 넌지시 보여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