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감을 잊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채워지는 순간은 행복과는 결이 다르다. 가끔은 고통이나 울적한 마음도 동반하고는 하니까. 다만 누를 때마다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버튼이므로 미리 잘 파악해두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나름 머리를 굴려 채워지는 순간을 떠올려봤다.
1. 자연
2. 고요
3. 사랑
4. 몰입
5. 감동
자연
극상의 채워짐을 선사하는 공간이다. 어떠한 의도도 없이, 어떠한 이해타산도 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곳. 그리고 매일 봐도 매일 달라지는 곳. 매번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는 않은, 가장 안락한 곳. 개인적으로는 황량한 자연환경을 좋아한다. 물론 녹음이 우거진 숲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사막이나 황무지, 고산지대, 절벽과 설산은 언제나 좋다. 그 처연하고 쓸쓸한 감각이 항상 혈관부터 채워주는 기분이다.
고요
내게 있어 공간의 가치란 실은 고요함으로 측정된다. 고요함이란 물리적인 조용함과는 다르다. 한없이 내향적인 내면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때로는 가슴을 살짝 누를 정도로 먹먹한 감각. 설령 파도가 치더라도 아무도 없는 해변은 고요하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갤러리도 고요하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흔적이 없는 상태가 고요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명상을 하며 그 고요함을 한껏 안으로 들인다.
사랑
사랑은 한없이 넓다가도 또 한없이 좁아진다. 그만큼 뭐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녀석이다. 다만 항상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는 점, 또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끌고 온다는 점으로만 가닥을 잡을 수 있을 뿐이다.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면 그래도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잘 붙어서 약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몰입
가끔 일을 하거나 콘텐츠를 접할 때 그 순간에 한없이 가라앉아 다른 것들이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 이 세상에는 오로지 너와 나뿐이니까. 내 자의식에서도 아득하게 멀어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기분이다. 빠져든다. 나를 잊을 정도로. 이렇게 보면 채워짐이란 실은 나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일지도. 그리고 그 과정이 도리어 살아있다는 감각을 가져다준다는 아이러니.
감동
어디엔가 '나는 감탄하기 위해 산다'라고 쓴 적이 있다. 가슴 한 구석에서부터 올라오는 찌릿함. 목구멍을 타고 얼굴에도 화색이 돌게 만든다. 너무 좋다. 하지만 감동은 의식적으로 느끼기 어렵다. 항상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설령 같은 작품을 또 접하더라도 같은 감동을 맞이할 수는 없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만큼 인간이 단순한 생물이 아님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