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지혜
깊이 만큼이 '나'다
현재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디자이너를 맡고 있다. 사실 디자인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다. 군대에서 포토샵 책 하나 던져주면서 "이거 보고 메뉴판 만들어."라는 말을 들었던 게 시작이다. 더듬더듬 마우스를 움직여가며 디자인이라는 걸 처음으로 익혀나갔다. 일러스트레이터도, 프리미어 프로도, 프로크리에이트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배운 적도, 그 흔한 학원에서 배운 적도 없다.
대신 유튜브나 몇몇 책에 흩어져 있는 지식을 긁어모으고, 그래도 모르는 부분은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다. 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다행히 금방 배워나갔다. 학창 시절부터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던 자기 주도 학습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공교육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회가 아무리 발달하고 기술이 발전해도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교육 시스템에 주렁주렁 달린 게 많아서다. 커리큘럼도 짜야하고, 인력도 배치해야 하고, 예산도 집행해야 하고. 그러다 장관이나 교육감이 바뀌면 무산된다.
옆에서 사교육이 치고 들어온다. 비싸긴 하지만 값은 한다.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배울 수도 있다.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정보의 비대칭성을 누릴 수도 있다. 여기서 시대가 한번 더 변한다. 각종 플랫폼을 타고 강의와 스킬이 무료로 뿌려진다. 이제 포토샵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갈 필요가 없다. 유튜브를 켜고 '포토샵 기초 강의'만 쳐도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강의 영상 수백 개가 나온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뀐다. 학위의 중요성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학력의 유통기한이 예전 같지 않다. 사소한 부분이라도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배움이란 실은 교문 밖을 나가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사실 거창하지도 않다. 일상에서 필요한 배움은 MBA나 로스쿨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 하다못해 리코타 치즈를 만드는 방법이라든지, 포토샵에서 쉽게 누끼 따는 법이라든지.
물론 이런 잔잔바리(?) 스킬만으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동시에 깊어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래저래 학교에서만은 배울 수 없는 지혜다. 공부는 사실 책이나 강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공부다. 저마다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방식과 성향에 맞게 배워나가면 된다.
난 분석가 스타일이다. 단어 하나라도 끝까지 파고든다. 분석이란 단순히 수치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특정 대상에 대한 사상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순수하게 즐겁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다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맛볼 때, 새로운 것에서 익숙함을 찾을 때 짜릿하다.
내게 세상이란 하나의 거대한 도화지 같다. 그 빈칸을 채워가는 게 나에게는 공부다. 방법은 다양하다. 글을 쓸 수도 있고, 영상을 만들 수도 있고, 책을 볼 수도 있고, 사람을 관찰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관찰이다. 그 대상에 관심을 두고 찬찬히 살피는 것. 그러다 보면 그 자신조차 모르던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 조그마한 발견을 조금씩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 그게 내가 정의한 내 정체성이자, 본업이다.
변화가 빠를수록 그 흐름에 끌려다니기보단 자기중심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어설프게 따라가 봐야 어차피 또 바뀔 테니까. 대신 중심을 더 깊게 위치시켜야 한다. 얕으면 금방 본전이 드러난다. 이건 지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깊이, 내면의 깊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대체한다고 난리를 쳐도 남을 사람은 남는다. 기술에만 의존하면 자리가 사라진다. 거기에 깊이를 더해야 한다. 깊이란 자신이 가진 정체성과 특수성을 이해하고 가장 잘 활용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딱 깊이 만큼이 나다. 그 외에는 사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