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공허한 사람은 공허하지 않다
공허감이 다시 도진다.
공허감을 굳이 표현하자면, 현실과 유리된 상태랄까. 여기서의 현실이란 감각적으로,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부세계를 말한다. 그리고 나 자신마저도 그 '외부세계'의 깊은 웅덩이에 빠져버린다. 느끼지만 느껴지지 않는 대치상황이 계속될 때마다, 아, 나 또 공허하구나, 또 시작이다, 시작이야. 이렇게 깨닫곤 한다.
사실 이 상황에서 어떠한 작위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이 내 영혼에 가닿지 못하는데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현실에서 적용되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당위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만큼 무서운 상태도 없다. 슬프거나, 화나거나, 우울하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그런 감정적인 무언가에 기댈 수라도 있다면,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 나설 텐데. 현실이 소용없다는 냉정한 진단 앞에서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군가와 공허감을 나누면 도움이 될까.
공허감에 대해 글을 쓰면 도움이 될까.
햇빛을 보고 운동을 하면 도움이 될까.
책을 잔뜩 읽으면 도움이 될까.
도움이 된다는 일이 도움이 될까.
사실 누군가와 공허감을 나눈다는 것에는 꽤나 신중한 편이다. 공허감이 삶의 기본값이라는 걸 밝히는 데는 주저함이 없지만, 서로의 공허감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이란 꽤나 소수라는 걸 지난 삶을 통해 자각한 탓이다. 그리고 공허감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 꽤나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므로, 그래서 속에서만 적당히 삭히다 삼키고 만다. 공허감을 나누기에는 꽤 공허하다는 사실도 거기에 일조를 할 테고.
어차피 나 아닌 남이 나의 공허감을 받아줄 이유는 없다. 그런 짐을 지우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글을 쓴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생각에서. 그래서 운동을 한다. 그 찰나의 순간이나마 내가 실은 붕 떠있다는 감각을 알아채지 않으려고. 그래서 책을 본다. 허무에 관한 한 조각의 깨달음이라도 붙들고 싶어서. 그래서 뭐라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공허감을 지우는 데 도움이 될까 하고.
요즘엔 전략을 조금 수정했다. 공허감을 적대하기보다는 받아들이기로. 그냥 이것도 나의 삶의 일부로 편입하려고. 책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공허감에는 거대담론도, 의미도, 감각이나 희망조차도 궁극적인 치료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신 삶은 원래 공허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안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나가자고 속삭인다.
그래서 자기 전에 한 번씩 명상을 한다.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어떤 우주적인 깨달음이 정수리를 때리고 척추를 따라 번개처럼 찌르르 전율을 일으킬 거라는 기대. 그저 내면의 공허를 마주하고 그 공허에게 악수를 청한다. 반갑고요.
눈을 감고 저리는 다리를 애써 무시한 채로, 그냥 가만히 정신을 흩트려놓는다. 무언가에 특별히 집중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렇게 있는다. 유연성이 없어서 가부좌는 안 되고, 반 가부좌 상태로.
공허하다.
당연하다.
공허하다.
그렇다.
공허하다.
맞다.
공허하다.
받아들인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공허하다.
다리가 조금 저리다.
공허하다.
허리도 조금씩 저리다.
공허하다.
그렇지.
공허하다.
나도.
공허하다.
공허하다는 생각을 한다.
공허하다.
공허하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본다.
공허하다.
난 왜 공허한 거지?
공허하다.
이렇게 태어났다고 볼 수밖에는.
공허하다.
그런데 어쩐지 싫지는 않아.
공허하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 같아. 그런데 어쩐지 싫지는 않아.
공허하다.
공허하니까. 공허하니까 싫지는 않아. 아니, 그냥 상관이 없다고 해야 하나?
공허하다.
진정 공허하다면 공허함마저도 상관이 없다.
공허하다.
공허하기에 공허하지 않다.
공허하다.
공허감마저도 감정의 발현이고, 자아의 꼼지락 거림이니까.
공허하다.
괜찮다.
공허하다.
오히려 좋다.
공허하다.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공허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공허하다.
공허함을 아는 사람은 거대담론의 말장난에 코웃음을 칠 수 있다.
공허하다.
공허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존재마저도 끌어안을 수 있다. 안에 채워질 공간이 충분하니까.
공허하다.
공허하다는 건 공허한 게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는 자각에서 오는 일종의 파동이다.
두근, 두근, 두근,
아,
나 살아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