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거니 May 19. 2024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미혼으로 살 줄 알았다

진짜 할 줄은 몰랐지 나도

언젠가 <연애 잘 못하는 남자의 00가지 특징>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혹시 난가?'싶어 들어가 봤더니 이럴 수가, 누가 내 특성만 골라서 넣었는지 아주 뼈를 때린다. (혹시나 순살 치킨이 될 독자가 있을까 봐 여기엔 구구절절 적지 않겠다.) 그러다 순도 90%의 T답게 납득해버리고 말았다. 진정한 사고형(T)은 자기 자신에게도 논리의 화살을 거두지 않는 법이다.


잠시나마 셀프 진단을 해보니 이거, 결혼할 견적이 나오질 않는다. (이유를 대라면 끝도 없겠지만 여기엔 구구절절 적지 않겠다. 슬프니까.) 연애와 결혼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여 보았지만 이 역시 자기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시대에 횡행했던 정략결혼도 아니고, 연애라는 과정 없이 어떻게 결혼을 하겠는가.


아, 이런 상황에서의 비혼주의 선언은 얼마나 허망한가. '못 하는' 걸 '안 한다'라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거다. 할 수 있는데 안 해야 그게 멋이지. 미친 듯이 결혼을 갈망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을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옆에 있었으면 하는 츤데레 영감 같은 인간이니까.


그래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흐물거리는 신기루처럼 저 먼 어딘가에서 아른거릴 뿐이었다.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하고 있지만 어쨌든 '내 일'은 아닌, 사라지지는 않지만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렇게 이번 생은 '싱글 in 경기'로 마무리할 줄 알았다.




"나랑 결혼할래?"


당시 여자친구에게서 이 말을 들었을 때 잠시 생각했던 건 '꼭 지금 해야 하나?'라든가, '결혼을 이 사람이랑 해야 하나?'가 아니라, '내가 결혼해도 되는 사람인가?'였다. 시기는 상관없었고, 할 거라면 이 사람이었고, 그리고 난 비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던 우리는 그렇게 얼마간의 고요 속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싱거운 프러포즈라니, 내 입맛에 딱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의 고백은 마치 재채기처럼 나왔다고 한다. 납치해서 같이 살고 싶어서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고. ("너, 납치된 거야." 참으로 로맨틱한 문장이다.)


"그래, 그러자."

인생의 큰 결정은 의외로 쉽게 내려진다.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할 수 있었던 이유만큼이나 할 수 없었던 이유도 산더미처럼 많았으니까. 세상은 인과율에 의해서만 흘러가진 않는다. A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꼭 B라는 명확한 원인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써놓고 나니 정말 T 같다.)


그냥 인생이 원래 그런 거지 뭐, 하고 싱겁디 싱거운 대답을 할 수밖에. 내 결혼 소식에 정말 진심으로 '놀라던' 이들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치얼스. 껄껄.

이전 01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결혼식 전까지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