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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May 12. 2024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결혼식 전까지는

그래도 하길 잘했다

사실 결혼식이 완벽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계획대로 잘 진행되기만 바랄 뿐이었다. 그것도 큰 욕심이었던 걸까?


맑은 날이 쭉 이어지다 식 당일에만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덕분에 마당에 깔아 둔 테이블은 처량하게 물을 맞는 신세가 되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 즐기는 야외 뷔페 식사여, 안녕.) 아침에 차를 후진시키다 범퍼를 대차게 긁기도 했다. 당시에 꽤 큰 소리가 났는데, 멀쩡하게 굴러다닌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무엇보다 아내가 짜증이 나있었다. (이게 가장 큰일이었다) 이유는 100만 가지쯤 되었는데, 특히 어른들이 오며 가며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쌓여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다.


"아유, 메이크업이 그게 뭐니?"

"드레스 그렇게 입으면 춥지 않니?"

"2부 드레스 따로 준비 안 했니?"

"이번 결혼을 계기로 신앙생활을 다시 해보는 건 어떨까?"

"배가 너무 나와 보인다, 얘."

"뭐 하니, 손님들한테 인사드리지 않고?"


물론 덕담도 있었겠지만 원래 거슬리는 말이 더 오래 남는 법이니까. 은혜는 물에 흘려보내고, 원수는 레이저로 돌에 새긴다고 했던가.




얼굴을 아는 손님과 얼굴을 모르는 손님에게 잔뜩 인사를 드리고 나니 어느새 식장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아, 이 얼마나 피하고 싶었던 순간인가. 순도 99%의 내향형인 나로서는 원치 않는 주목을 받는 건 고역스러웠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신부라지만 신랑도 주요 조연쯤은 된다. 벌벌 떨지는 않았지만 삐걱삐걱 걸어가는 내 모습이 영 어색하긴 했으리라.


"신랑 입장!"

이라는 소리를 듣고 걸어 나가는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다. 모델 워킹 따위 배운 적 없는 나로서는 괜히 당당해 보이게끔, 하지만 건방지지 않게끔,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아니 그냥 편하게 걸어야 하나? 나 어떻게 걸었었지? 왼발이랑 왼팔이 같이 나가던가? 와, 나 걷고 있잖아. 내가 신랑이던가? 어디까지 걸어가야 하지? 저기, 저기? 앞에 있던 신부(그 신부가 아닌 성당에 계신 신부)님이 뒤로 돌라고 눈치를 준다. 아, 맞다.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선다.


저 멀리서 아내가 걸어왔다. 장인어른의 손을 꼭 잡고서. 그때의 마음은 뭐랄까,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딱 그 시점에 우리가 결혼한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 둘 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전투복을 함께 입은 전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렇다. 웨딩드레스와 맞춤 정장(및 구두 및 넥타이 및 두툼한 메이크업)은 결혼이라는 전쟁터로 나갈 때 챙겨 입는 군복과도 같다. 물론 무진장 비싸고 예쁜 군복이지만.


그렇게 혼인미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세부적인 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섰다가 하다 보니 끝나 있었다. 중간에 처남의 축가가 있었고("사아아랑~~이란 말이 어울리는 사라아아암~~"), 귀여운 조카의 후렴구가 있었고("우우우우~~~"), 증인과 함께 하는 서약이 있었고, 결혼식보다 더 힘든 사진촬영이 있었다. 웃다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다. 집에 가게 해 주소서, 아멘.


식당에 내려가 역시나 얼굴을 아는(혹은 모르는) 손님에게 인사를 100번쯤 하고, 자리에 앉으니 입맛이 없다. 그토록 애정해 마지않는 참치회, 연어회가 앞에 있는데도. 어지간히 긴장하긴 했나 보다. 깨작거리다가 소화에 도움이 될까 싶어 식혜랑 사이다를 연거푸 들이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리마인드 웨딩은 하지 말자."며 그날의 소회를 밝혔다. 두 번은 못하겠다. 물론 해서도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정말 그래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결혼식에서 마음에 드는 구석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짜증 났고, 피곤했고,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정말 그래도,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딱 그 지점에서 의미를 찾았다.


결혼식, 한 번쯤은 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느낄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안 해도 상관은 없다. 세상은 넓다. 다른 종류의 고통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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