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결혼은 언제 하니? 너 결혼은 언제 하니? 너 결혼은 언제 하니? 너
"너 결혼은 언제 하니?"
어른들의 입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세계는 멋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믿는 청년들)은 자신만의 네버랜드로 옮겨갔다.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TV 앞에서 스마트폰 앞으로, 야근에서 워라밸로, 능이백숙에서 마라탕후루로. (사실 능이백숙을 더 좋아하는 나는 이제 어른인가?)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하지 않고도 삶이 건강하게 이어질 수 있음을 자각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 탓이다. '비혼주의'를 선언하고, '딩크'를 추구하고, '생활동반자법'의 입법을 기다리고, (반려'자'를 제외한)'반려 00'과의 오붓한 여생을 꿈꾸게 되었다. 옮아갈 세계가 있다는 건 항상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애초에 왜 기존 세상에서 도망치듯 떠나오게 되었는지 떠올려본다면 어쩐지 슬픈 감정이 들곤 한다. "너 결혼은 언제 하니?"라는 말을 듣고 그저 '결혼'만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단어는 쉬이 '대입, 입대, 취업, 출생, 효도' 등으로 치환되니까. 얼마 전 가족과 친척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나왔던, 여전히 생명력이 질긴 질문이다. ("너 애는 언제 낳니?")
그럼 저 질문은 왜 이리도 불편할까, 아니 왜 어느 새부터 안 멋질까? 생각해 보면 결혼이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 아니던가? 디즈니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클라이맥스이자,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하겠다는 굳은 다짐이자, 각자도생의 들판에서 우리만의 울타리를 세우겠다는 약속인데 말이다. 왜냐면 거기에 '내'가 없음을 자각했으니까.
멋지다는 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답게,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뿌려지는 꽃가루와 같다. 결혼에 저런 수식어는 어쩐지 어색하다. 적어도 많은 이에게 그렇고, 어쩌면 나에게도 그렇다. 결혼생활에는 만족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추천하겠지만, 그렇지만 모두가 할 필요는 없다고, 할 거라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는 이유다.
그래서 차라리 이기주의자로, 불효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넌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라는 고(故) 신해철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결혼은 안 멋지지만 내 결혼생활은 멋지게.
어느 새부터 결혼은 안 멋져
이건 하나의 유행 혹은 TV show
우린 돈보다 사랑이, trophy보다 철학이
명품보다 동묘 앞 할아버지 할머니 fashion
"너 결혼은 언제 하니?"가 세상을 망치는 중이야
중요한 건 평화, 자유, 사랑, My Life
- <불협화음> 일부 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