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망없는 커플의 칩거 여행기
결혼의 로망 3대장이라고 하면 '프러포즈, 결혼식, 그리고 신혼여행'이 아닌가 싶다. 프러포즈나 결혼식은 휘뚜루마뚜루 해치우더라도 신혼여행만큼은 꿈과 희망을 가득 담아 떠나리라 굳게 마음을 먹은 커플이 한둘이 아니리라. K-직장인 입장에서는 합법적으로(?) 길게 놀 수 있는 기회요, 지난한 결혼식 준비에 대한 달콤한 보상이기도 하니까.
문제는 우리 커플이 신혼여행에 대한 로망이 거의 없었다는 데에 있다. 해외생활을 길게 했던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나 역시 예전만큼 해외여행을 가고픈 욕구가 크게 일지 않았다. 게다가 대출을 상환하고 식을 치러내느라 한없이 홀쭉해진 지갑 사정을 보아하니 후환이 슬슬 두려워지던 참이었다. 그래서 그냥 신혼집에서 칩거하며 에너지 충전을 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다 친척 중 한 분이 제주도에 있는 한 호텔을 저렴하게 섭외해 주셨고, 이렇게 된 거 호캉스나 즐기자며 짐을 꾸렸다. 시차도, 비자도, 바가지 씌우는 택시도, 구글 번역기도, 환전도, 비행기 환승도, 현지 유심칩도, 호객행위도, 미세먼지도 없는 아름다운 섬 제주도. 나름 비행기도 타고 가니 여기야말로 로망 없는 커플에게는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도착한 곳은 제주도 중산간에 위치한 리조트형 호텔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형적인 오션뷰 호텔과는 거리가 있지만 저 멀리 한라산도 배경으로 보이고, 우거진 숲 속에서 수영도 즐길 수 있는 고즈넉한 장소였다. 비수기라 그런가 사람도 많이 없었고, 이래저래 집돌이와 집순이에게는 참으로 시의적절했다.
우리 둘은 책을 보고,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수영을 하고, 밥을 먹고, 사우나를 하고, 밥을 먹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쨍쨍하면 쨍쨍한 대로의 시간을 감각하면서. 절대 부지런 떨지 않고, 세상 게으르게. 딱 우리답다.
물미역처럼 수영장에 둥둥 떠다니며 하늘과 숲과 저 멀리 한라산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 거쳐왔던 고행, 아니 결혼 과정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눈에 담았던 하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역시 사건사고가 없으면 여행이 아니다. 제주도를 떠나는 날,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다. 유심칩이 들어있는데 왜 읽지를 못하니. 4년 반이나 구른 탓에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이다. 신분증이나 비행기표도 이 안에 있는데 귀찮은 일이 생겼다 싶었다. 공항 데스크에서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핸드폰 옆구리 찌르는 핀을 빌려서 조심스레 다시 뺐다가 끼웠다.
오, 다행히 다시 깨어났다. 행여 다시 기절할까 싶어 얼른 검색대를 통과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핸드폰은 결국 집에 도착하자 운명을 다했다. 어떻게든 나를 육지로 데려다주려고 남은 수명을 쥐어짰던 걸까, 하고 괜히 감상에 젖었다. 기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