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너 없이 진행하는 극한의 가성비 결혼식
0. 프롤로그
'나랑 결혼할래?'와 '신랑 입장!' 사이에는 깊이 10km의 크레바스가 있다. 그 안에는 미혼일 때에는 알지 못했던 거대한 세계, '웨딩 시장'이 존재한다. 이 세계는 게걸스럽게 예비 신랑신부의 시간과 돈을 먹어치운다. 그 고난을 이겨내지 못한 수많은 커플이 결국 흑화하여 갈라서는 참극을 면치 못했으니, 이 어찌 비극이 아니겠는가.
1. 플래너, 여정의 시작
웨딩 시장에 발을 들인 예비부부는 플래너라는 갈림길 앞에 서게 된다. 오로지 서로에 대한 마음만을 안고 순수하게 길을 떠났던 둘은 이때부터 어른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플래너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연신 외치는 현대인을 위한 인솔자 같은 역할을 한다. 혹시 해외 패키지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가? 아무 생각 없이 깃발만 따라다니면 3일 만에 유럽 4개국을 찍는 기적의 순간을 목도하였는가?
플래너란 바로 그 깃발 같은 분들이다. 물론 이들만 따른다고 해서 모든 일이 만사형통으로 흘러갈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플래너는 '스드메'로 대변되는 굵직한 사항만 챙겨주지, 여전히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잘한 디테일은 스스로 신경 써야 하니까. 우리 부부는 상의 끝에 플래너는 따로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시간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호기로운 마음도 한 스푼 있었고. 그렇게 위태로운 여정이 시작된다.
2. 예식장 예약은 ASAP으로
결혼 준비의 시작은 상견례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실은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예식장을 선점하는 것. 코로나 이후 혼돈 그 자체가 된 웨딩 시장에서 '결혼식 날짜가 그래도 한 6개월 남았으니까 충분하겠지? 헤헤' 같은 순진한 태도로는 살아남지 못한다. (우린 그 순진한 커플 중 하나였다.)
인기 시즌, 인기 예식장은 최소 1년 전부터 예약해야 겨우 번호표를 뽑고 들어갈 수 있다. 스트레스가 잠시 밀려오겠지만 잠시 넣어두자. 아직 재밌는 부분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 다행히(다행인가?) 열렬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성당 예식장을 예약할 수 있었다. (참고로 난 무신론자다.)
3. 상견례는 소화가 잘 되는 곳에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두 문명의 충돌이라고 했던가. 평생을 봐온 내 가족과 이제야 안면을 트게 된 상대방 가족의 만남이라니, 속에서 얹히기 딱 좋은 환경이다. 언제 어디서 만날지, 어떤 식당에서 어떤 메뉴를 시킬지, 자리배치는 어떻게 할지, 누구와 동행할지, 2차로 카페를 갈지 등 신경 써야 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괴로운 건 상견례 중간에 찾아오는 무거운 침묵인데, 이럴 때 양쪽 부모님이 '내 자식 자랑대회'라도 여는 순간에는 식은땀이 절로 나온다. ('그만!') 순도 99%의 내향형(I)인 나였지만, 사망해있던 MC 세포를 꺼내어 최대한 이야기를 끌어갔다. 다행히 아버지들끼리 케미가 잘 맞아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4. 스드메가 무엇의 준말인지도 몰랐는데
결혼을 준비한다면 모를 수가 없는 '그' 단어. 스드메. 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준말이다. 그리고 사실 저 스드메는 각각 2번씩 결제하기 때문에 '스스드드메메'로 불러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지금까지 지갑 단속을 잘 해오던 이들이 가장 많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보태보태병'을 아는가? 수많은 옵션을 추가하다 보면('여기에 00만 보태면....') 결국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웨딩 시장은 좀 안 좋게 말하면 참 악랄하게 구성되어 있다. 딱 이 정도까지만 지출해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도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가격 공개도 투명하게 되어있지 않고, 심지어 요금을 오픈하면 위약금을 무는 곳도 있다. 이렇게까지 정보가 비대칭한 시장이 또 있나 싶다.
5. 반지에는 손맛이 들어가야 제맛
예물이나 예단은 따로 하지 않았지만 결혼반지는 있어야 했기에, 반지 공방을 찾았다. 혹시나 좀비 사태라도 터지면 팔아먹자고 해서 순금 반지 하나와 평소에 끼고 다닐 가락지 하나를 맞췄다. 공방에서 서로를 위한 반지를 직접 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마무리(를 비롯한 수많은 공정)를 사장님이 해주셨기에 제작이라고 하기엔 쑥스럽지만.
사장님 왈, 반지 만드는 스타일만 봐도 서로의 성격이 나온다고 한다. 상여자답게 나무망치를 거칠게 휘두르는 아내와는 달리, 난 16비트로 일정하게 반지를 두드렸다. (드럼을 배웠더니 이런 데 써먹는다) 그렇게 너무 두드린 탓에 아내의 반지는 헐렁해지고 말았다. 적어도 안 빠질까 봐 걱정할 일은 없겠구려, 껄껄.
6. 그리고,
이 외에도 신혼집 및 혼수 비용, 청첩장 인쇄비, 각종 사례비, 청첩 모임 비용, 결혼식 전 관리 비용, 신혼여행 비용, 출장 뷔페 비용, 답례품 비용 등 들이자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용 세례를 맞게 된다. '일생에 단 한번'이라는 저 한 문장이 참 무섭다. 예산 수준보다 많이 들여도 후회하지만, 너무 아끼면 자괴감이 든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해도 계속 곁눈질을 하게 된다.
사실 모든 건 선택의 영역이다. 우리 부부는 (절약요괴인 내 탓이 크다) 최대한 가성비 있게 진행했지만, 이게 꼭 정답은 아니다. 아예 결혼식을 올리지 않는 '노 웨딩'도 있고, 스몰이라고 쓰고 빅이라고 읽는 '스몰 웨딩'도 있고, 호텔에서 진행하는 값비싼 결혼식도 있다. 다만 돈과 시간이 한정적이니 거기에 맞춰서 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건 결혼식 자체가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남겨진 시간이다. 그 시간을 보내기 전 서로와 맞춰가는 연습을 하고, 울고불고 싸우기도 하며 부부로 성장해 간다. 물론 아직도 햇병아리 같은 신혼부부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사정이 넉넉해지면 꼭 가성비 떨어지는 작고 비싼 반지를 사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