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빼면 난 누굴까

이제는 나를 긍정하자

by 신거니

난 항상 어딘가에 속해있는 사람이었다. 아주 어릴 땐 가족에게, 조금 자라서는 학교에, 군대에, 회사에 소속되었다. 재수생이나 휴학생 시절은 있었지만 여전히 돌아갈 곳이 있었고, 그때의 신분으로 나를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퇴사를 하고 나면 그야말로 자연인이 된다. 난 그냥 나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순간쯤은 언제든지 마주하게 된다. 낯선 이에게 나를 소개할 때, 명절 때 나의 상황을 친척에게 설명해야 할 때, 자신에 대해 생각할 때조차 말이다. '회사 다니고 있어요'하면 편하겠지만 구구절절 사족을 붙여야 한다. 이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히' 쉬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면 말이다. 하다못해 취준생이어야 하고, 고시생이어야 하고, 질병으로 몸져누운 환자여야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비껴갈 수 있다.


퇴사를 결심하고 이직을 포기한 순간, 저 무거운 짐을 자진해서 떠안아야 한다. 나야 신경 안 쓴다고 쳐도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생각하면 끝이 없다. 한국은 대표적인 집단주의이자 관계주의 사회다. 독립적으로 살아가기에 척박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과 자기 검열, 은근한 죄책감이 항상 어깨를 짓누른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남을 함부로 판단한다.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모르고.






사실 소속은 정체성과도 관계가 깊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정체성이다. 소속은 손쉬운 답변을 제공한다. 내가 어느 회사 어느 부서의 어느 직책이라고 말하면 해결된다. 반대로 소속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해보자. 가족, 회사, 학교 등 집단을 빼놓고 나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당장 떠오르는 게 없다. 기껏해야 성별이나 나이, 출신 지역 정도다.


문제는 저런 특성이 '진정한 나'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데에 있다. 정체성은 보편성과 고유성을 동시에 가진다. 소속을 빼고 자신을 설명한다는 건 결국 고유성을 캐내는 작업이다. 다만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 관계주의 문화 탓에 고유한 자신만의 특성을 찾기가 조금 어려울 뿐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고유성에 대한 오해다. 흔히 고유성하면 이마에 커다란 일련번호라도 찍혀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 그게 고유성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떠올려보자.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아무리 특이한 취향, 고도의 기술,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그게 과연 고유할 까?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치자. 그게 나를 오롯이 서술할 수 있을까?


한두 가지의 특성으로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그건 환상이다. 고유성은 보편성의 묶음이다. 설령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특성이라 해도 그 특성의 조합은 고유하다. 컴퓨터는 0과 1로 세상의 지식을 담아낸다. 끝없이 이어진 두 숫자의 조합 덕분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람은 더 유리하다. 전 세계 인구가 고작해야(?) 70억 명인 데다 한 특성이 수십, 수백 가지 갈래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내 삶을 이루는 보편성의 조합을 서술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개인은 오로지 그 '묶음의 묶음'으로 자신의 고유성을 설명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소속도 사실 나를 설명할 훌륭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취향, 신념, 신체적 특성, 가치관 등 다양한 단서조항을 달면 온전한 나를 마주하게 된다. 특성 하나하나가 곧 나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특성이란 바뀌기 마련이고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일한 하나의 실체가 아니다. 또한 영속적이지도 않다. 나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페르소나도, 내면에 있는 이드(id)나 에고(ego)도 나다. 정확히는 나를 이루는 요소다. 나를 받아들인다는 건 그 모든 파편을 끌어안고 긍정한다는 걸 뜻한다. 회사를 다니는 나도 나고, 회사를 다니지 않는 나도 나다.


이를 잊으면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나를 설명하던 그 무언가가 사라지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회사를 다니다 퇴사를 하면? 난 누구지? 이제 나를 뭐라고 해야 하지? 회사원이 아닌 자신을 상상하지도, 성찰하지도 않았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평생을 회사만 바라보며 살다가 퇴직을 한 사람들이 헛헛함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분명 이들에게도 회사 밖에서의 삶이 있지만 둘은 온전히 통합되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에서의 나와 바깥에서의 내가 분리된 모습이다. 자아분열은 자아 부정으로 쉽게 이어진다.


회사를 빼면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면 자신을 잘 돌아보자.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고, 뭘 못하고, 뭘 싫어하고, 어떻게 살고 있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고, 어떤 성격인지. 어떤 보편성과 고유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답이 나라는 거대한 바구니 속에 잘 담겨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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