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동료가 말했다. '저 퇴사해요'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by 신거니

연말에 퇴사한다고 귀띔했던 회사 동료다. 안타까움 반, 응원 반 위로를 받던 게 엊그제 같은데 먼저 나가다니. 얼마 전 지원했던 회사에 덜컥 붙어버렸단다. 나가야 하나 남아야 하나 고민이란다. 나 같으면 다른 도전을 해보겠다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결정은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때때로 등을 살짝 떠밀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쯤, 이미 절절히 느끼고 있어서다.


하나둘씩 직장을 떠난다. 동기 하나도 이직하여 나가게 되었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옆팀 과장도 있다.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할 예정이다.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파문을 남긴 채. 그렇게 떠나가겠지.


사실 퇴사를 처음 결심했을 때 주변 사람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초점은 오로지 나에게 맞춰져 있었으니까. 내가 힘들어서,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그 결심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 고민은 모두의 등에 얹힌다. 같은 무게는 아닐지언정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회사에서 그래도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부담감. 그 엷은 죄책감이라니. 내 결정엔 변함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상상하는 건 퇴사하는 '나'의 모습이다. 하지만 퇴사한 나의 '빈자리'가 남는다. 물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겠지. 나와 같은 일을 할 다른 누군가로. 그 자리에 연연하진 않으련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모두의 마음속에 내가 조금씩 담겨 있다면, 그 마음의 빈자리는 어떻게 하려나. 다른 누군가로 채울까? 아니면 영영 공석으로 남아 있을까?






황경신 작가가 말했듯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그 존재가 영영 사라지고 나서야 진득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집 귀염둥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교환학생을 마치고 현지 친구와 마지막 포옹을 나눴을 때. 난 그제야 알았다. 이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고 존재의 자각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느낌. 내 일부가 닿지 못할 곳에 그렇게 남겨진다.


누군가 떠나간다.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에 관한 아쉬움일까? 아마도 이제는 사라져 버릴 나의 흔적에 대한 마음이겠지. 모든 사람에게는 내가 조금씩 묻어있다. 나에게도 모든 이의 체취가 남아있다. 지긋지긋한 상사의 업무 스타일도, 웃자고 흉내 내던 서로의 말투도, 추억도, 시간도. 그 향이 강하게 남을수록 미련은 더해진다. 나를 떠나는 건 어쩌면 회사 동료가 아니다. 나의 파편이다.


그 파편에는 저마다 다른 이름표가 붙어있다. 어떤 이름표는 쉽게 떨어져 나가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다. 사실 대부분의 크고 작은 이별이 그렇지 않을까. 나이를 먹어가며 이별에는 조금씩 둔감해진다. 둔감해져야 한다. 누군가를 떠나보낼 일이 그만큼 많이 생기니까. 어찌할 수 없는 사정도 더 이해하게 되니까.


하지만 어떤 이름표만은 지독히도 오래 남는다. 그리고 특정한 계기를 통해 종종 수면 위로 고개를 쳐든다. 잊지 말아 달라고 손을 흔드는 듯. 절절하고 간절하게. 욕심이 난다.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삭막하디 삭막한 이 회사라는 공간에서조차 말이다. 그렇다면 내 회사생활, 제법 훌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