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진정하게나
그런 날이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도 몸서리가 쳐지고, 싱크대에 묻은 얼룩 하나에도 짜증이 나고, 번거로운 공인인증서 로그인 절차에 더욱 화가 나는 날. 예민함과 민감함에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터져 버릴 것 같다. 이게 밖으로 표출되면 히스테리가 되고, 속으로 삭히면 노이로제가 된다. 그럼 난 중얼거린다. 완벽주의가 또 도졌구나.
난 완벽주의자라기 보단 완벽주의증 환자에 가깝다. 완벽주의자는 어딘가 깔끔하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준다. '전 완벽주의라서요'라는 말을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이미지와 난 아무래도 맞지 않다. 그저 속으로 씩씩거리는 사춘기 소년 같다. 서툴고 볼품이 없다.
완벽주의는 두려움에서 온다. 조금이라도 뭔가가 흐트러지면 두려움의 연쇄 폭발이 일어난다. 그렇게 굉장히 사소한 일로도 극단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아주 손쉽게. 조금만 물러서서 생각하면 별게 아닌데 그게 그 당시엔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계속 신경이 쓰이고 당장 나서서 해결하고 싶다.
그럼 난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걸까? 내 치부가 드러날까 봐,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내 미래가 사소한 일로 한없이 엇나갈까 봐. 하나하나 써놓고 나니 어이없는 이유뿐이지만 어쩔 수 없다. 완벽주의의 무의식 속엔 이런 비합리적인 믿음이 깔려있다. 의식적으로 어느 정도는 노력할 수 있지만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그저 매 순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완벽주의가 도졌다고 알아채는 것처럼.
물론 알아챘다고 해서 바로 완벽주의가 사라지진 않는다. 사실 완벽주의를 배척할 이유도 없다. 완벽주의는 브런치 글의 오타를 잡아내거나, 친구에게 신중한 조언을 하거나, 깔끔한 책상을 유지할 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스스로를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기에 경계하는 것뿐이다.
전 직장에서도 그랬다. 난 완벽주의증 환자였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일을 붙들고 꾸물거리기 일쑤였고, 어김없이 질책이 날아왔다. 그렇다고 불완전한 결과물을 넘기자니 성에 차지 않았다. 더구나 상사는 내 실수를 하나하나 잡아냈다. 유일한 해결책은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하는 것. 대개 정확성을 희생하긴 했지만 가능한 한 빠르게 업무를 진행했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일을 처리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시큰거리는 손목을 수시로 마사지하며 하나둘씩 쳐낸다.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완벽주의증은 옆에서 한 마디 거든다.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마음의 소리를 애써 무시한다. 하나하나 완벽하게 봤다가는 시간 안에 절대 끝낼 수 없다. 정신이 없다. 안에서는 양가적인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충돌하고, 사방에서 언제 끝나냐며 재촉을 해댄다. 그래도 꾸역꾸역 마무리를 한다. 가끔은 시간이 빌 때도 있다. 100m 전력질주를 하다가 갑자기 멈춘 기분이다. 앉아있어도 숨이 찬다.
일이 하나라도 더 얹어지면 짜증이 난다. 밥상을 다 치웠는데 국을 엎은 격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짜증을 쉽게 내고, 조금 더 조급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런 기분을 안고 집에 가면 증세가 더 심해진다. 주변에서 잔소리를 하는 상사가 없으니 거리낄 게 없다. 사소한 일에도 금세 기분이 상해버린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떡하지?
완벽주의증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완전한 존재가 답이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있다. 오늘도 출근을 하다가 한 마리를 만났다. 비록 흩날리는 털과 알레르기를 안기는 존재이지만 고양이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요전에는 산책길에서 치근덕거리는 녀석을 마주쳤는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자연도 그렇다. 그 먹먹한 고요함 속에 침잠할 때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이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나에게 완전함을 안긴다. 그렇게 증상이 호전된다.
퇴사를 하고 회사에서 얻은 조급증이나 완벽주의증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사실 회사 탓만 할 수는 없다. 모든 건 내 마음에서 온다. 완벽하지 않음을 받아들이고 완전해지기 위해 노력하자. 한껏 충만함을 느껴보자. 역설적으로 완벽하지 않아야만 내 인생도 완벽해지지 않을까. 힘을 빼고 조금 더 유연하게, 짜증 내지 말고 너그럽게. 남에게도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