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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Jan 12. 2022

나는 어쨌든 글 쓰는 사람

오늘도 하나 썼다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로 알려진 문장이다. 루머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류의 명언이 대개 그렇듯 사실 실제로 스피노자가 저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나는 뭘 하고 있을까? 그런 상상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낼 수 있으니까.


지구의 종말, 죽음, 우주 멸망 등 극적인 사건은 대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된다. 뿌연 안개가 걷어지고 최우선시하는 가치가 금방 드러난다. 영화 <돈룩업>은 거대한 운석이 충돌해 멸망하기 직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이를 먼저 발견한 주인공은 대중에게 경고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과학자로 대변되는 이성을 믿지 않고 진지함을 잃어버린 대중과 미디어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은 가까운 이들과 모여 만찬을 즐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야 무엇이 소중한지 선명해진다. 책 <행복의 기원>은 행복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행복의 원형을 가장 잘 담아낸 장면이 아닌가 싶다.


질문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옮겨온다. 나는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온다면 뭘 할까? 물론 가장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겠지만 그 전에는 글을 한편 쓰겠다. 내 인생이 어땠는지, 난 어떤 생각을 남기고 가는지를 쓰겠다. 그렇게 조금 더 분명해진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지구가 멸망하기 전 글쓰기는 부질없어 보인다. 어차피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텐데 뭐하러 글을 쓰나. 사실 맞는 말이다. 죽음을 기점으로 모든 게 사라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거나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대개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모든 게 허무하니 흥청망청 인생을 써버리거나, 아니면 남은 시간 동안 나답고 가치 있게 살아가거나.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을 언도받고 감옥에서 리라(하프와 비슷한 악기)를 연습한다. 이제 죽을 판인데 태평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리라 연주란 남은 생을 가치 있게 보내는 방법이었다. 인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던 현인의 결론은 이렇다. 가치 있는 삶이란 조금씩 더 나아지는 그 자체라고. 그게 리라 연주 실력이든 글쓰기든 사랑이든 뭐든 간에. (참고로 소크라테스는 평생 글을 쓰지 않았다. 진리란 글로 전해질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굳이 죽음이나 지구의 종말 같은 상황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글쓰기는 내게 충분히 가치 있는 활동이다. 복잡한 머릿속도 금방 정리되고 생각을 표현하는데 이만한 도구가 없다. 내향적이라 낯을 가리는 편인데 글에는 그런 나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대답을 재촉하지도 않고, 지루한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지도 않는다. 몇 번이나 다듬고 또 다듬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온전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글쓰기가 들어갈 것이다. 나는 어쨌든 글을 쓰는 사람이다. 힘든 순간도 있지만 글은 내게 자유를 준다. 마치 자유자재로 빙판 위를 누비는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난 글과 글 사이를 오간다.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생의 길엔 항상 글쓰기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오늘도 글 하나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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