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비밥과 아이유
최근 <카우보이 비밥>(이하 비밥) 시리즈를 정주행하고 있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방영한 작품으로 20세기 최고의 애니메이션으로 인정받고 있다. 제목에 들어있는 비밥(Bebop)은 재즈의 일종이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성에 있다. 정해진 악보 없이 각 세션이 모여 합을 맞춘다. 그렇게 하나의 새로운 선율이 만들어진다.
배경에 흐르는 재즈 선율과 더불어 이 작품을 더욱 재즈스럽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즉흥성이다. <비밥>은 매화마다 마치 다른 작품인양 다양한 장르를 보여준다. 액션, 코믹, 로맨스, 호러, 스릴러 등 종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어색하지가 않다. 이 모든 장르는 '비밥'이라는 하나의 큰 장르에 녹아든다. 실험적이지만 자신감이 넘친다. 오죽하면 이런 대사를 컷신에 넣었을까.
The work, which becomes a new genre itself, will be called Cowboy Bebop.
(스스로 새로운 장르가 되는 작품은 앞으로 <카우보이 비밥>이라 불릴 것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비밥>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장르가 되었다. 다른 예시로는 아이유를 꼽을 수 있다. 아이유의 플레이리스트에는 심심찮게 '아이유라는 장르'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전형적인 아이돌에서 넓은 스펙트럼을 소화하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 아이유의 행보는 <비밥>의 그것과 닮아있다.
물론 과정은 달랐다. <비밥>은 다양한 장르를 버무려 자신만의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내었다. 반면 아이유는 자신의 색깔을 내려놓고 우선 잘 먹히는 부분을 파고들었다. 아이돌 아이유는 수많은 삼촌팬의 심금을 울렸다. 입지를 다지고 서서히 활동 반경을 넓혔다. 아티스트 아이유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나라는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비밥>스럽게 혹은 아이유스럽게. <비밥>처럼 자신만의 탄탄한 세계관 안에서 다양한 메시지를 던지는 방법도 있고, 혹은 아이유처럼 시장성이 있는 분야에서 먼저 팬층을 확보하고 이를 확장해나가는 방법도 있다. 보다 현실적인 방법은 후자가 아닐까 싶다.
<비밥> 같은 작품이 더 이상 나오기 힘든 이유도 명확하다. 시장성에 대한 데이터가 쌓이고 성공 공식이 어느 정도 확립되다 보니 새로운 실험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해적이 될 수 있는데 왜 해군에 지원하는가?"라고 했지만 이제 그런 시대도 정녕 저문 걸까?
<비밥>이 완전한 디지털 패러다임으로 이행하기 직전인 20세기 말에 나왔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촉발한 PC 혁명에서 애플이 활짝 열어젖힌 모바일 혁명으로의 변화. 빅데이터라는 도구가 생겨나고 모든 게 분석되기 시작한 시기. 해적이 되라고 말했던 스티브 잡스가 촉발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훌륭한 선원이 될 수 있는'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예전이 좋았다' 식의 넋두리를 할 생각은 없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살아야 하는 게 현대인의 숙명 아니겠는가. 변화의 속도가 겁날 정도로 빠른 요즘, 나는 오롯이 나로서 설명될 수 있을까? 나만의 독특함과 열정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그물을 넓게 펼쳐야 할까, 아니면 한 곳만 집중적으로 파야할까?
현재 유효한 방법은 '집중 -> 확장'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퍼스널 브랜딩이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선 특정 주제나 테마, 커뮤니티에서 영향력을 확보한다. 그 과정은 지난하고 반복적이다. 그 이후 고정 팬층이 형성되면 그 기반에서 넓게 뻗어가야 한다. 유튜브에서 구독자가 몇십, 몇백만 명인 채널을 보자. 큰 줄기는 있으나 한 가지 콘텐츠만 제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비밥>이 주는 인사이트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세계관이 탄탄하다면 애초에 다양한 소재 자체를 장르 삼아 펼쳐놓는 식이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이는 비단 연예인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자칫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은 하나하나가 조그만 우주다. 그 자신이 경험하고 사색한 모든 존재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만 들춰보면 남에게 들려줄 이야기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걸 정제된 형태로 미디어에 풀면 된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장르가 된다는 건 일종의 '셀프 대상화'다. 에리히 프롬은 책『자기를 위한 인간』에서 '시장지향형' 성격 유형을 언급한다. 시장지향적 인간은 스스로를 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스펙, 스토리, 능력은 있으나 정작 자아가 없는 이들이다. 팔리지 않는 모습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가 갑자기 공황장애를 겪거나 우울감에 빠지는 건 이 때문이다. 지속되는 경쟁에 지친 탓도 있겠지만, 시장에서 잘 팔리는 페르소나를 더 이상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팬이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편집된 나의 편린만을 소비할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느낌도 든다. 자신의 이 모든 어려움과 치부, 어두운 면은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정말 필요한 건 '나라는 장르'를 온전하게 수용하고 받아줄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명이라도 내가 연주하는 선율을 이해한다면, 난 계속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그게 글이든 영상이든 디자인 파일이든 노래든 음식이든 뭐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