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첫 주, 유현준 작가님의 '공간이 만든 공간'이라는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책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도 곧바로 읽었고 또 다른 책들까지- 어디서 살 것인가, 공간의 미래 등 - 이어서 1월 독서 리스트에 추가할 정도였다.
(작가님의 다른 베스트셀러들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 처음 제목만 보았을 때는, 그리고 건축가가 저자라는 사실만 보고서는 단순히 집 짓기나 인테리어 관련된 실용적인 내용을 다룰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 문화의 기원, 빙하기와 농업혁명 등 정말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고, 12시간 넘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 비행기에서 읽기 참 좋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들을 마치 내 일상처럼 느껴지게 이야기를 풀어내서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챕터별로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책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고 중간중간부터 읽기 좋아하는 나에게 딱 맞는 구성이었다. (독서 노트는 추후 별도 업로드 예정.)
그중에서도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서울의 다양한 거리들을 '얼마나 걷기 좋은 거리인가'로 수치화해 평가한 내용이었다. 단순히 느낌이나 분위기, 또는 랜드마크가 되는 건물의 유무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아주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명동, 가로수길, 홍대, 테헤란로 등에 점수를 매긴 것이다. 첫 번째는 단위 면적당 가게의 입구수가 다양할수록, 두 번째는 그 거리에 존재하는 이동하는 물체들의 이동속도가 많고 다양할수록 걷는 사람 입장에서 재미있고 '걷기 좋은 길'이라고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뉴욕 맨해튼의 경우 Avenue 가 Street 보다 훨씬 걷기 좋아 보이는 이유도 이의 연장선에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왔는데 여행 갔을 때가 생각나면서 공감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 자체 거리두기에 매우 충실한 라이프를 살고 있는 나에게 서울의 명동, 가로수길, 홍대는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요즘 매일 산책하면서 걸어 다니는 우리 동네를 이 기준으로 평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서울과의 근접도가 좋은 수도권 도시이지만, 이렇게 한국을 대표할만한 사례에서는 당연히 서울이 우선시 되기 때문에 우리 동네가 연구 사례로 나오는 경우는 안타깝게도 찾기 보기 매우 어렵다.
하루에 적어도 5 천보, 많으면 1만 보는 꼭 걷는 것을 목표로 산책 타임을 하루 일과에 꼭 포함시킨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 간다. 이렇게 매일 걷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산책 코스'를 짜 놓고 오늘은 'xx 코스' 내일은 'yy 코스' 이렇게 돌아가면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떤 코스는 분명 어제 갔는데도 자꾸만 또 가고 싶어지는 반면 1-2주에 한 번 꼴로만 찾게 되는 코스도 있다. 신기하게도 계절이나 시간대에 따라서도 한 때는 최애 코스였다가 비인기 코스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래서 판교/분당 지역 산책 코스들을 위 두 가지 객관적인 기준 1. 단위면적 당 복잡도 (가게 입구수) 2. 이동속도 3. 그리고 나의 다소 주관적인 의견을 담아 평가해보았다.
1. 탄천코스
분당의 명물 탄천. 특히 봄/가을에는 벚꽃 명소이자 단풍 명소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몰려든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웬만한 가게들 수십 개 모아놓은 것 안 부러울 정도로 걷기 참 좋은 코스이다. 비록 가게는 없지만, 많은 가게 입구수가 의미하는 것이 사실은 그만큼 '다채로운' 볼거리와 '변화화는' 분위기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탄천은 최고의 코스이다.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며 흐르는 탄천물과 그 위를 바쁘게 움직이는 오리들과 두루미, 물고기, 그리고 20-3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과 계절별로 바뀌는 꽃들만으로도 이미 볼거리가 넘쳐난다. 여기에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 이들을 추월하며 경보로 걷는 사람들, 땀 뻘뻘 흘리며 러닝 하는 사람들, 이보다 더 빠르게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동속도를 보이며 다채로움을 더해준다. 한가운데 모여서 농구하거나 스케이트 보드 타는 사람들, 그리고 돗자리를 펴고 앉아 여유 부리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이보다 더 다양한 속도감을 보이는 거리를 찾기도 쉽지 않을 만큼 '재미난' 거리가 된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나뭇잎이 시들어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의 탄천은 매력도가 떨어져서 잘 안 가게 된다. 나오는 사람도 적으니 그만큼 '덜 재미있는' 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나마 자전거를 타고 좀 빠르게 달리면 같은 단위 시간당 내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훨씬 많아지니 지루함이 덜하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길과 걷고 싶은 길의 차이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이런 관점으로 접근하니 조금 이해가 간다.
2. 테크노밸리코스 (삼환하이펙스, H 스퀘어, 유스페이스)
판교 테크노밸리는 사실 꽤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지만, '메인'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삼환하이펙스부터 유스페이스까지 이어지는 광장들이다. 특히 삼환하이펙스 쪽은 카페촌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동네 카페들 수십 개가 줄지어 있어 재미난 풍경이 펼쳐진다. 그 앞에 노천카페 스타일로 테이블과 의자도 빼곡히 놓여있어 점심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나온 직장인들까지 합세하면 그야말로 복잡도+속도 측면에서 최고점을 받을만한 거리가 된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나온 점심시간에 이 거리를 걸어야만 활력이 느껴졌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주말은 거의 유령도시 수준으로 카페들도 문을 모두 닫는 동네이기 때문에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평일 낮'에 걷기 딱 좋은 거리이다. 캄캄한 밤에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화려한 간판들과 유리 건물들의 조명들 덕분에 지루함이 조금은 덜 한 동네이다.
3. 판교역앞메리어트코스 (메리어트호텔, 알파돔, 현백, 아브뉴프랑, 롯데마트)
판교 직장인 회식의 성지, 판교역. 특히나 2차, 3차는 대부분 메리어트 호텔 반경 300미터 내에서 이루어진다. 위에서 언급한 테크노밸리 쪽에도 몇몇 술집이 있긴 하지만, 진정한 '인싸 분위기'는 메리어트 호텔과 마주 보고 있는 테라스 형태의 맥주집, 횟집, 양꼬치집, 곱창집 등에서 느낄 수 있다. 낮에 테크노밸리에서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산책하던 직장인들이 밤에는 메리어트 근처로 모두 몰려와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동네는 오히려 낮에는 문 닫은 가게들이 많아 딱히 구경거리가 없다.) 밤에는 창밖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주변의 화려한 조명이 더해져 뭔가 드라마 속 한 장면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산책하다가 잠시 넋 놓고 '사람 구경' 하기 좋은 거리. 단, 흡연자도 많고 취객도 많은 거리라서 직접 골목길을 걷기보다는 멀리서 바라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 앞으로는 얼마 전 드디어 완공된 알파돔의 유리창에서 화려한 미디어아트를 구경할 수 있다. 아직 건물들 1층에 가게가 입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메리어트를 지나 판교 현대백화점까지 걸어가는 길이 한 층 걷기 좋아졌다. 특히나 분당/판교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포장마차를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 판교역 근처인데, 붕어빵, 닭꼬치, 어묵 등 제법 다양한 음식을 팔고 있어 거리에 재미요소를 더해준다.
반대쪽으로는 판교에 현백이 들어오기 전까지 '센터'를 차지하던 아브뉴프랑이 있다. 확실히 1층 가게들이 큰 쇼윈도를 갖고 있고 가구, 옷, 식물, 와인 등 다양한 제품을 팔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음식점 종류도 카페, 디저트 샵, 피자집, 샐러드 집, 소고기집, 인도 카레집 등 겹치는 메뉴가 거의 없고, 일단 무엇보다 깔끔하게 정비된 거리라서 개인적인 취향에 딱 맞는 거리이다. 만만하게 한 바퀴 살짝 돌고 오고 싶을 때 애용하는 코스.
4. 동판교카페거리코스 (백현동)
현대백화점이 생기기 전에는 아브뉴프랑과 함께 판교에서 그래도 놀만한(?) 거리가 바로 이 백현동 카페거리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차가 다니지 않는 걷기 좋은 길을 따라 양쪽으로 카페들과 분위기 좋은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테크노밸리 쪽 카페는 대부분 소규모에 가격대도 저렴한 편이라면 이쪽은 좀 더 여유를 즐기기 좋은 분위기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도 붐빈다는 느낌은 전혀 받기 어려운 한적한 동네라서 자주 가게 되는 코스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목적지인 카페거리에 도달하기까지 거쳐가야 하는 길이 아파트 대단지 2-3개이다 보니 '복잡도'나 '속도' 그 어느 기준으로도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코스이다.
이런 길의 경우는 산책할 때 '목적'이라는 요소를 추가해서 걷곤 한다. (비록 가는 길은 조금 지루할 수 있어도) 거기에 있는 어떤 가게에 가서 뭔가를 구매해와야 한다는 목표가 생기면 정처 없이 걷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한 번에 왕복으로 거의 만보를 찍을 수 있는 코스라서 컨디션이 좋은 날 애용중.
5. 화랑공원코스
분당에 율동공원과 중앙공원이 있다면 판교에는 화랑공원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지만 나름 구역을 잘 나누어서 알차게 꾸며놓은 공원이다 보니 탄천처럼 볼거리가 많은 거리이다. 특히 운중천을 따라서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랑공원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 찻길을 건너지 않고 안전하게 산책할 수 있는 코스다.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벚꽃시즌과 단풍시즌에는 자전거 타는 사람, 스케이드 보드 타는 사람, 가운데 잔디에서 공놀이 하는 사람, 캠핑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진정한 '도심 속 자연' 느낌이라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도 도시의 복잡함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편 겨울에는 탄천과 마찬가지로 발길이 끊기는 편이라 현백만 찍고 돌아오기는 아쉬울 때 화랑공원을 경유해서 집에 오는 편이다. 그래도 조만간 봄이 오면 거의 매일 같이 가게 될 코스.
이상 다섯 가지 코스 외에도 서판교 도서관 코스, 서판교 농협 코스, 아름마을 코스 (a.k.a 한살림 코스), 서현역 코스 등 좀 더 멀리 산책 갈 때 애용하는 길들이 있다. 정리하고 보니 각 코스의 장단점이 너무 달라서 BEST를 뽑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 새로운 도시를 여행하게 될 때 다양한 가게가 많이 있는 거리를 골라서 코스를 짜면 좀 더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