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성인간 Aug 15. 2019

B급 상사

실력과 인성 사이 적당한 교차점에 대해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을 만나고 사귀게 된다. 만남의 선택이 자의적일 때도 있으며 타의적일 때도 있다. 직장인들이 공감하겠지만 직장동료, 상사와 같은 단어로 정의한 존재는 대부분 타의적이다. 내가 선택해서 만나는 사람들이 아닌 내가 선택되어 만나는 사람들.


하루의 절반은 그들을 만나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한다. 표면적인 부분에서는 꽤나 매력적인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보통 직장동료와 상사라는 단어는 불편하고 거부하고 싶다. 그럴만한 이유를 간략히 나열해본다면, 개인 프라이버시는 침해받지 않아야 하고 함께 공존하지만 경쟁해야 하며 일에 있어 시비를 가리게 되고 동일한 양의 업무를 수행하지 않는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겠다. 더 많은 이유가 있겠다만 생략하겠다.


과거에 내게는 아주 불편한 상사가 있었다. B급 상사라 칭하자. 겉모습은 아주 매력적이고 젠틀했다. 말은 수려했으며 철두철미한 성격 때문에 일에 있어 집요했다. 실력 있는 상사였고 임원들에게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그의 업무능력에 대해서는 나도 별다른 이견이 없을 정도로 깔끔했고 훌륭했다.


B급 상사는 훌륭했으나 나와 맞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고방식부터 업무에 대한 접근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업무 스타일 등 모두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와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B급 상사는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사소로운 부분에서도 그 마음이 역력히 드러날 정도로.


부하직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에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일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업무 스타일을 모방했고 그의 말을 신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가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첫인상이 끝인상이었을까? 나의 노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간의 수고로움과 노력은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 때문에 생활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일거수일투족을 고양이에게 쥐 잡히듯 뜯겼다. 내가 빗어낸 문장의 한 글자, 아니 심지어 초성까지도 박살이 났다. 매번 고함소리에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려야 했고 무엇보다 자존감이 바닥이 난 상태였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중간에 틀어지거나 말끔하게 끝맺지 못했다. 내일은 결국 직장동료의 일이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가 가장 버티기 힘들었던 것은 동료의 깊은 한숨소리였다.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린 그 기분은 지금도 영영 잊을 수 없다. 너무 치욕스러웠고 두려웠다.


B급 상사는 굉장한 워커홀릭이었다. 목표한 스트라이크가 30개라면 야구공을 100만 개라도 던질 사람이었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없다면 일의 총량을 늘려서라도 성과를 채우는 사람이었다. 모든 업무를 수치화하고 지표화하길 원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했던 업무가 결코 객관화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매우 자주적이며 주관적인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디자인, 색감, 감각, 글귀, 어감과 같은 단어처럼. 한없이 불만족스러울 수 있는 비객관적인 대상이었다.


B급 상사는 냉정했다. 인정이 어려있는 대화의 시작은 단칼에 묵살시켰다. 정해진 선을 강조했고 그 선을 통해 관계를 정의 내렸다. 권위적이었다. 군림하는 위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 권력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하직원을 움직여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상사였다. 단, 과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쳇바퀴처럼 내게 하던 말이 있었다. “무쇠처럼 단련시켜야 한다.” 나는 달궈지지 못하고 끝내 녹아내리는 플라스틱이었다. 압도감과 중압감은 나를 흘러내리게 했다.


나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남들은 신의 직장이라고 말했지만 나에게는 그곳이 지옥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은 공포와 혐오가 가득 찬 굴레가 되었다. 물린 톱니바퀴에 두 다리와 팔을 끼워서 의식 없이 돌아가는 기계처럼 회사를 출근했고 퇴근했다. 나는 내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했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나는 패배자였다. 극도로 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오후가 되면 먹었던 점심을 하루도 안 거르고 열심히 게워댔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인사발령이 났다. 내가 하던 일 중에 하나가 문제가 발생했고 민원이 들어왔다. 결과물의 불만족으로 인한 지속적인 보이콧에 용역업체에 추가 예산 충당이 필요했다. 하지만 추가 예산 지급요청에 마찰이 생겼다. 나는 B급 상사를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 일 덕분에 나는 다른 부서로 이동했다. 결과적으로 위기는 기회였다.


난 또 다른 상사를 모시고 있다. 그를 A급 상사라 칭하자. 업무에 있어 잔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인정이 많고 내가 하는 일을 응원해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이었다. 어려움을 호소하면 극복할 수 있는 해결방안을 모색해줬고 내가 부담하지 못할 중압감을 대신 짊어주는 사람이었다.


난 목적의식을 갖고 성과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고 패배자로 씌워진 프레임을 벗기 위해 노력했다. 3년 차가 되는 시점에 난 인사고과로 트리플 A를 달성했다. 그렇게 바닥난 자존감은 서서히 회복해갔다.


3년 동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하지 않았다. 근거 있는 불평에 대해 당당했으며 정당한 업무를 위해서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철저 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일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다 보니 일이 즐거웠다.


A급 상사와 나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말에 했던 생활에 대해 묻고 육아에 대해 고민을 나눴으며 가끔은 실없이 농담 섞인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직장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을 얻고 있다. 노력하지 않아도 관계는 더없이 단단해졌고 그를 위해 부서를 절대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다.


조직에게는 B급 상사와 A급 상사 중 누가 더 필요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있어 필요했고 앞으로 필요할 사람은 A급 상사다. 부하직원이 스스로 존중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비전을 가치와 동일시 여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은 A급 상사였다. 부하직원이기 이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며 두 아들의 아빠임을 인간적으로 인정해주고 가정에 몰입하게 해주는 것도 A급 상사였다. 사무실에서 웃고 떠들고 빈 공백 기간의 안부를 묻던 이도 A급 상사였다.


실력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사람의 인성과 인격도 응당 존중받아야 한다. 일에 목적을 두고 있냐 일을 하는 사람에게 목적을 두고 있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이며 그 사람이 어떤 가치와 사상을 지니고 일을 하는지, 그 일로써 결국 그 사람이 존중받는지가 아닐까 싶다.


A급 상사는 내일모레 건강검진으로 자리를 비운다. 그가 아무런 탈이 없었으면 하며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그의 안부를 속으로 묻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노자와 장자는 YOLO족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