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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Jul 29. 2019

부드러운 직선

양면성 : 한 가지 사물에 속하나 서로 맞서는 두 가지의 성질

남들은 다 가는 대학에 떨어져 의도치 않은 재수생활을 하던 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바로 '심리 수업'이었다. 민머리에 근사한 수염과 다부진 체격을 가진 심리 강사는 남들에게는 말하지 못할 안정감과 위로감을 주는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처한 나의 상황이 남과 비교했을 때, 매우 불행하며 초라한 상황이었기에 그가 입에서 뱉어낸 단어의 조합들은 내게 신성한 신의 가르침과 같이 마음을 울려댔다.


그가 운영하던 심리연구소의 명칭은 '부드러운 직선'이었다. 처음 수업을 진행할 때, 부드러운 직선으로 심리연구소의 이름을 명한 이유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그 전문이 사실 기억나지는 않는다. 한가지 확실히 기억나는 개념은 다음과 같다. 세상을 이루는 사물을 스스로 단정 짓기 어렵다. '점'의 형태가 모여 '선'을 이루며 '선'의 형태는 공간에 따라 '곡선'이 되기도 하고 '직선'이 되기도 한다.


그 말을 그 당시에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단어가 가진 양면성에 대해 끝없는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왜 부드러운 곡선이 아닌 직선이지?" 가짜 어른에서 진짜 어른으로 성장한 지금은 내 뇌리 속 깊이 박힌 '부드러운 직선'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점'의 형태를 인간이라 칭하면 인간이 모여든 사회는 곧 '선'을 의미할 수 있겠다. '선'은 사회 구성원들의 목적과 목표에 맞게 '직선'이 되기도 하고 '곡선'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목표와 목적을 갖는지에 따라 형태만 달라질 뿐, 스스로 가진 고유한 성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직선이라고 해서 곧아야 할 이유가 없으며 곡선이라고 해서 구부려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행동과 행위에 대해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판단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오로지 '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 '개인'이 보는 관점에 따라 '선'은 곡선이 되기도 하고 직선이 되기도 한다.


민머리에 근사한 수염을 가진 심리 선생님은 아마도 나에게 '현재 처해져 있는 위치에 대해 좌절하지 말 것'과 인생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가르침을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 양면성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세상을 인정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성인이 되어 술과 담배, 자유를 맘껏 누리는 대학생의 삶과 비교할 때, 재수생의 신분은 상대적 박탈감이 큰 위치였다. 끝없이 좌절했고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해 거부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나는 '내 인생이 모두 끝났다.'라고 느낄 정도로 큰 상실감이 가슴속 깊이 박혀있었다.


다음 해에 나는 대학에 갔고 누리지 못했던 자유와 성인으로서의 삶을 마음껏 누렸다. 놀기도 정말 많이 놀았고 친구도 많이 사귀고 그동안 끊임없이 억제된 감정을 있는 힘껏 분출하듯이 마음이 가는 대로 행했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매번 주말에 집에 가 엄마를 뵐 때면 내 표정에서 행복함이 묻어있는지 '그렇게 행복하니?'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대학생활을 겪고 나서 느낀 것은 '상황인식에 대한 객관화의 어려움'이었다.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힌 '재수생'이 바라보는 '대학생활'과 대학생이 바라보는 '대학생활'은 달랐다. 당사자의 시선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되고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듯 아주 사소한 부분에도 양면성은 존재했다.


어쩌면 인생은 모두 양면성을 지닌 결과의 총합이다. 애당초에 객관화할 수 없으며 개인에게 치우쳐진 주관적인 기록들이다. 일방적인 수식과 규명으로 점철된 전지적 작가의 편협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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