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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인간 Nov 23. 2020

아트만

자아의 본질  

'아트만'은 본질적인 자아의 근원을 의미한다. 힌두교에서 창시된 개념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실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아트만은 곧 우주이자 세계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138억 년이 족히 넘는 우주의 존재와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것은 우주에서 태어난 인류뿐이다. 인류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넘어 우주의 비밀을 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결과, 자신의 내면의 깊은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을 겪어갔다. 한없이 깜깜한 어둠 속 깊숙이 침잠해있는 존재에 대한 그 사유와 의미에 대해서 그들은 정답을 찾는 과정을 겪어가며 비로소 세계와 자아의 근원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축의 시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대거 세상에 등장한 시기다. 싯다르타,  우파니샤드, 노자와 공자라 공존했으며 멀고 먼 유럽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던 시절이다. 사회라는 관념의 세계 속에 인류는 도시화를 통해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문명의 시대는 곧 혼돈의 시대였다. 가시적으로는 사회유지를 위한 질서와 법률이 정해졌지만 오히려 그 질서와 법률로 인해 자유가 탄압받던 시기였다. 계급화가 이뤄져 평등했던 권리가 사라지고 상대적 박탈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  어쩌면 인류는 이 혼돈의 시점에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삼라만상 속에서 인류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필연적 사유의 귀결로 위대한 스승들이 사고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통과 분열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했던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은 현대에 이르러 잊혀 갔다. 혼란을 멈추기 위해서는 자아의 본질을 이해하고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깨우쳐야 하지만 사회과 특정계층의 의도에 의해 질서유지와 안정화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약속된 명목적인 관념들로 인하여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직면하고 허상에 불과한 세상 속에서 생존을 위해 본질을 잃어갔다. 그들은 아트만을 상실해갔다. 


아트만은 무엇인가? 내 정신이 깃든 뇌와 사고의식인가 아니면 내가 숨 쉬고 감정을 드러내는 내 신체인가. 이 두 가지도 모두 아트만은 아니다. 관찰자의 이식. 다시 말해 내면을 경험할 수 있고 그 내면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이 바로 자아이자 아트만이다. 


범야일여, 세계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세계라는 일치된 개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트만은 곧 브라흐만이자 세계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의 내 자아도 결국 세계의 일부이자 그 일부들이 모여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지극히 합리적일 수도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다. 결코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아트만은 곧 멈춰 있으며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가만히 정지해있어도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세계는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아트만을 고려하면 가끔 시공간의 개념과 움직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세계가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과거의 책에서 읽었던 원주민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나침반과 풍력 장치 1개도 없이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를 건너 섬을 무사히 건넜던 그 원주민. 원주민들은 꼴랑 3명이 탈 수 있는 나무로 된 엉성한 배와 노를 가지고 몇백 키로가 넘는 바다를 건넜다. 그 원주민 중 한 명은 밤낮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물의 냄새를 맡을 뿐이고 나머지 2명은 조용히 노를 저을 뿐이다.  그들은 사고방식부터 현대인과 달랐다. 


원주민들이 바다에 배를 타고 나아가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 아닌 멈춰진 상태로 생각했다. 즉 자신들은 그대로 바다에 멈춰있고 마치 물과 섬, 이 둘을 이루는 지구가 자전하며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천체의 움직임을 예를 들었다. 세계가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바다에 멈춰진 상태로 배를 타고 기다리면 그 거리가 몇천 킬로가 되더라도 결국 자신들에게 그 섬이 움직여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재밌는 일화였다. 세계라고 하면 우리는 그동안 물질적 세계만 생각했지만 인간이라는 종, 사회 그리고 지구와 그 지구를 닮은 다양한 별이 모여 뭉쳐진 우주가 모두 하나이자 곧 내가 우주일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 스스로가 누구를 통해 태어난 것도 아니며 그대로 존재했다는 사실. 아트만은 태어난 적도 없고 육신이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등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가 온전히 보존되는 의식보다 더 큰 무엇. 그리고 어쩌면 그 물질적 세계의 비밀이 담긴 상자. 결국 우주와 자아는 하나라는 것을 알아버린 선구자들의 깨달음. 그 실타래처럼 얽힌 복합적 의식이 곧 아트만일 것이다. 그리고 붓다와 예수 등 인류의 참스승들을 그 비밀을 일찌감치 깨달았을 것이다.


책을 읽고 새로운 개념을 익힐수록 근원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세계와 사고의 근원이 궁금해지고 역사적인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과 저서들이 궁금해진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왔는지 그 언어와 말에 담긴 참된 의미와 진리가 무엇인지 거듭 더 알고 싶어 진다. 나의 본질과 나의 아트만에 대해 더 다가서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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