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어제같다.
강의록 250페이지. 예정대로였다면 이미 다 보고도 남았어야 할 양이다. 수업은 4시간도 안되는데, 강의록은 2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폭거가 이젠 익숙하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절반도 끝내지 못한걸까.
이상은 높았다. 예과 때처럼 최상위권에 머물고 싶었고,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해도 최상위권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몰랐다. 그래서 해봐야했다. 항상 하던것처럼, 우직하게 한 뒤에 다시금 방향을 설정하고, 또 다시 달려보고 또 고치고. 그런데 어쩐일인지 해부학, 조직학, 발생학, 신경해부학을 거쳐오는동안 나는, 끝없이 뒤돌아 고민할 뿐 정작 달리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가.
술취한 교수가 단톡방에 올려버린 글 때문에 식은땀이 난다. 다맞은 사람이 10명 가까이나 있는 시험에서, 나는 맞은 개수를 세는게 훨씬 빨랐다. 유급인가. 머릿속에 두음절이 맴돈다. 안된다 안돼. 평락인가. 안된다 안돼. 생각해보니까 평락일지도 모른다. 내 해부 등수는 높아봤자 20등, 낮으면 30등인데, 아 평락은 또 아닌가. 어쩌면 지금까지 2점대 성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마 받았을 것이다. 이번 세 과목에서 A 이상을 모두 받아야. 남들 앞에서 쪽팔리지 않은 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떨어졌나. 그 자신감 넘치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무너졌나. 그 내가. 다시 달리는 자세를 취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이제 그만 달리고 싶다. 근데 어쩌나 또 달려야하는게 내 숙제인것을.
코로나 때문에 모든 강좌가 사이버 강의로 바뀐 지금이 오히려 기회였다. 수험생 때 하던것처럼 항상 우직하게 나아가면 되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 생리학 개강 이틀차, 벌써부터 강의 복습이 밀리기 시작했다. 씨발.
그냥 좀 앉아서 공부하면 되잖아. 잘했잖아. 근데 왜 이러는거야 도대체 왜 왜 왜. 하기 싫다고 던지면 안되는거 알잖아. 오늘 지금 이 250쪽 자리 강의안이, 내일 되면 배로 불어날거라는 것도 알잖아. 근데 왜 안하냐고.
우울한 글 말고 좀 밝은 분위기의 글을 써보고 싶다. 이제 얼른 가서 하자. 복습은 끝내야지. 빨리 가서 하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