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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붐 Jul 23. 2022

귀갓길엔 미스트 처럼 비가 흩날렸어.

이미 지나간지 오래인 시절을 보내며

*글과 관계 없는 사진.



 우리의 마지막은 늦은 저녁이었어.

잔잔한 호수 위에 비친 불빛과 늦여름 달큰한 밤내음 아니 어쩌면 네 향기,

그 평범한 비누 향기가 옆에 있어도 사무치게 그리운 어느 여름 저녁이었지.

그리고 여느 때 처럼 우리가 본 영화에 대해서, 배우들에 대해서 얕고 긴 얘기를 이어갔어. 그때의 난 영화와 연기라는 토픽에 반쯤 미쳐 있었으니까.



어느새 시험을 끝내고  너는 언제 들어간지 모르겠는 사회인 극단에서 네가 출연하는 연극에 날 초대했고 루나틱이란 제목의 연극에 출연한, 여전히 손이 크고 몇 번을 봐도 호기심이 일어나는 너에게 그 대담하면서도  수줍은 미소와 꼭 닮은 작고 붉은 꽃을 선물했고 넌 꼭 그렇게 웃었어.




익숙한 곳인 듯 성대 골목 앞에 위치한 지금은 없어진 낡고 고즈넉한 바에 들어가 피나콜라다를 주문했고 난 아는 칵테일 이라곤 지금의 델문도가 된 함덕별장 사장님이 알려준 블랙러시안이 전부였기에 그걸 주문했어.




넌 철학과에 입학했고 영화를 부 전공으로 한다는 얘기와 그 간의 짧은 대학생활에 대해 얘기했어. 공부를 잘하는 옆 학교 전교 석차에 항상 들던 너는 입시 동안 열심히 공부 했고 나는 열심히 놀아서 재수를 해야했었지 그리고 내겐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어.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술만 홀짝이다 재밌게 봤다며, 너 정말 열심히 했구나 하는 덜떨어진 말 밖에 하지 못 했어. 다소간의 당황과 물음표가 묻어나는 네 눈동자만 멀뚱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진짜 덜떨어졌다. 나 말이야.




그 다음 연락이 닿은 건 스물 네 살의 가을이었고 나는 의병제대 전역 대기라는 명분의 긴 휴가를 받아 군대에서 일년만에 사회로 돌아왔고, 네가 학교 과제로 찍는다는 단편 영화에 출연해달란 얘기를 들었어.


얼마 되지 않는 준비 기간 이었지만 열심히 대본을 읽고 경북 사투리를 연습하며 우리의 과거 - 함께 영화 얘기로, 풋내기들의 어쩔 줄 모르는 엉망진창 끌림으로 점철된, 생에 두 번 있을까 싶은 우리가 보낸 여름밤을 생각했어. 앞으로 우리가 보내게 될 시간 같은 것도 생각 했겠다. 알다시피 나는 금새 들떠버리잖아.




촬영을 마친 저녁, 미스트 같은 봄비가 내렸고 넌 아무 말도 없이 급히 자리를 떠났어.

그 때 너는 어떤 생각 이었을까, 서로의 약속을 져버린 괘씸한 나에게 선물한 마지막 추억일까, 혹시 내 연기가 눈 뜨고 보기 힘들 만큼 엉망이었던 걸까, 그 새 내가 너무 바뀌어버린 걸 느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긴 시간 동안 바뀐 것 하나 없는 내게 실망 했던 걸까 돌아가는 길 모든 발걸음 아래 물음표가 있었어.


대학로에서 우산도 없이 돌아가는 길에 삶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와 처음 만나던 날의 복사 붙이기 형태로 남은 삶이 이어질 뿐이라는 생각도 잠깐 했어.

처음은 앞으로의 거의 모든 걸 보여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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