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일 금요일
"니가 지금 한시간 공부하믄 난중에 쌀 한가마니가 더 생기는기라"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란 미란은 성장과정 내내, 정확히는 돌잔치에서 붓을 잡아버린 그 사소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이후로, 줄곧 몸의 힘이 아니라 머리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할, 돈을 벌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의 반 평생을 소작농으로 한푼 한푼 모아 사들인 땅에서 드디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아버지는 30도가 훌쩍 넘는 해가 쨍쨍한 여름 한낮에도 지칠줄 모르고 농사에 매달렸다. 농사라는 것이, 수확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농부가 바삐 뛴다고 다 잘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런 아버지를 보면 당장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미란에겐 그럴 수 있는 시간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누구보다 성실히 농사 짓는 아버지는 '미란이 니도 이 애비처럼 쉴 새 없이 공부 해야 혀. 그게 살 길이여. 나가 딴짓하는 사이 딴 놈들이 니거 다 채가는겨. 그게 살 길이여.'
하는 말을 마치 게임 속 NPC라도 되는 양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곤 했다. 미란의 꿈 속에서도 그 말을 할 정도로 미란 깊숙히 내면화되어버린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미란의 아버지도, 모든 사촌, 지인 까지도 모두들 그렇다 하니까 그러려니-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역시 자신에게 공부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의 행위인 듯 싶었다. 지난 삼년을 집 책상, 학교 책상, 아버지가 빚 까지 내서 보내주는 학원 책상에서 온전히 보냈지만 시험 점수는 도통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고, 평균 85점을 넘지 못했다. 옆반 영일이는 하루 세 시간만 공부 한다는데 실수해 틀린 것들로 평균 97점을 받았고, 매일 미란과 노닥거리는 혜란도 비슷한 실정이었다.
미란의 공부 시간은 친구들 보다 곱절, 몇 곱절 더 길었으나 미란은 넘어설 수 없는 유리 천장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내내 느껴왔다.
역시 나는 공부는 아닌가본데... 미란은 뼈가 저리는 듯 했다. 우울과 좌절로 뼈가 저릴 수도 있구나. 새로운 발견이었다. 영일과 혜란은 이런 느낌 오래도록 알지 못하겠지.
그렇게 기운이 다 빠진 채 축 늘어져 책상에 고개를 묻고 엎드리기라도 하면 소리가 들려왔다.
'미란이 니 아부지 저 고생하는거 안보이나, 니도 아부지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라. 양심이가 있어야지, 먹여줘 재워줘 입혀줘 키워줘 어? 니는 천지 삐까리 다 아부지한테 받아자란긴데, 니는 그래 엎드려 퍼져서, 어!?'
소리가 들려오면 미란은 숨죽여 비명을 지르거나 책상에 스스로 머리를 내려찧거나 고함을 쳤다.
아 쫌!!!! 알았어 알았다고!!! 거기서까지 쫌 그만좀 하라고!!!
미란의 아버지는 그런 미란의 소리를 들을 때면 혼을 내기 보다는 조용히 헛기침을 하며 담배를 집어들고 나가곤 했다. 돌아오는 길엔 반쯤 녹은 하드 하나를 내밀고 조용히 주방으로 사라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