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Aug 12. 2022

10번의 이직과 한 번의 창업(2)

융통성 없는 사회 초년생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취학 아이들의 꿈과 희망인 00 랜드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살던 인천 집에서 용인에 있던 00 랜드까지는 편도로 55km였다.  


사사건건 매우 보수적인 편이었던 아빠는 여자라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와야지라고 말하면서도 어느 순간 면허증을 딴지 2개월밖에 안된 나에게 선뜻 자동차 키를 "자 옛다" 하며 쥐어주기도 하는 쿨한 태도를 뽐내기도 했다.  일관성은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사회초년생 시절 갓 딴 면허를 가지고 자차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감사했다.


2007년 1월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지만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던 시절은 아니었다. 지금 흔하디 흔한 교통량을 감안하여 길을 찾아주는 티맵(T-map) 같은 어플의 존재를 그때는 감히 상상도 못 하였던 것 보면 앞으로 얼마나 상상할 수 없는 녀석들이 나의 삶을 평안하게 만들어줄까 기대도 된다.


어쨌든.. 인천을 본적으로 두고 특히 서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매일 상습정체구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일을 뜻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천과 서울을 출퇴근한다는 것은 대중교통이나 자가를 이용하거나 그 어느 쪽도 녹록지 않은 일이다.

당시 나의 애증의 아이나비는 참으로 융통성이 없는 아이였다. 교통량이라는 걸 감안하지 않고 매번 최단 길을 꼬장꼬장하게 알려주었었다. 그것뿐이랴 수도 없는 이유로 나를 길을 잃게 한 적이 많았다 (내가 네비를 잘 못 봤다고는 절대 인정 안 함). 약속시간과 네비가 말하는 도착 예상시간이 같을 경우는 거의 100%의 확률로 그 약속은 늦어지게 된다고 생각할 만큼 길을 잃었었다. 약속시간까지 5분이 남았는데 지도에서 말하는 남은 거리가 20킬로 정도 될 때의 그 절망감과 분노 그렇지만 내 손은 운전대에 눈은 앞차에 둘 수밖에 없는 무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가운데 늘 평안을 찾았던 모먼트는 결국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내가 목적지에 갈 의향이 아직 남아있다면 언젠가는 도착하겠다는 믿음이 슬며시 고개를 쳐들 때였다.

물론 앞뒤 차가 막혀 있는 상황이 끔찍하게 짜증 나긴 하지만 결국은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점이다.


서울과 인천을 출퇴근하던 시절도 이제  10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 상습정체구간에 묶여있다가 혹은 수십 킬로 이상 떨어진 목적지를 향해  뚫린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강제 명상 시간을 갖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생각하는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직장 00에서 일했던 기억보다는 직장까지 가는 길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영동 고속도로를 매일 오가고 있을까?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졌던 교통 체증   모습이 떠오른다.


어쨌든 첫 자가운전을 선사해준 나의 첫 사대보험 가입장이었던 나의 첫 직장은 안전모와 등산화 그리고 각반이라는 것을 매일 쓰고 입어야 했다.


안전모를 쓰면 모자에 다 눌려 머리가 5분 만에 엉망이 되었으며, 늘 착용해야 했던 등산화를 신으면 어떤 옷을 입든 그냥 등산객 같았다. 게다가 꼬박꼬박 걸쳐야 했던 안전조끼는 내가 무얼 입고 출근하여도 구분 못할 정도로 내 몸 전부를 다 가려주었으며 그중에 가장 난감했었던, "각반"을 착용해야 했던 것은 차는 순간 4등신으로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아이템이었다.


< 각반 : 형 녹색 혹은 형주 황색으로 이루어진 또렷한 삼선 모양 밴드 바지가 공사 현장에 끌려 자칫 험한 사고로 연결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기 위한 기능성 밴드>


이 각반을 착용하면 다리 길이가 현저히 짧아 보이며 넉넉한 핏의 바지와 매치가 되었을 경우 밭매러 가는 형태가 되었다. 패션의 완성은 다리 길이라며 각반을 슬며시 빼고 들어가도 저 멀리서 형광 주황색의 유니폼을 입은 안전 담당 인부 아저씨가 어떻게 알았는데 호루라기를 불며 나를 불러.. 어서 차라고 저 족쇠같은 각반을 전해주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어쨌든 나는 예쁘게 보이는 모든 몸짓을 포기하고 공사 현장 인부 아저씨들과 참 친하게 지냈었다.

당시 공사 현장에는 업무에 따라 총 세부류의 인부 아저씨들로 나누어졌는데 안전조끼의 색깔로 구분하였다.

한 때 눈썰매장이었던 산둥이를 깎은 다음 그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심어 기초를 다지는 토목 담당 아저씨들은 파란색

이 롤러코스터를 이루고 있는 구조물은 실제로 사람 손을 빌어 볼트와 너트를 이용해 조립해야 했는데.. 여기서 목조 구조물의 조립을 담당했던 아저씨들은 빨강

그리고 조립된 구조물을 세워 뼈대를 맞추듯 높은 곳에서 다시 연결하는 조립팀은 노란색

나는 통역이나 하는 일개 신입이기에 무채색인 회색분자 같은 회색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퇴사한 직장 사장님과의 재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