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의 이직 중 첫 번째 이직
용인에 있는 테마파크를 그만두고 약 3주 뒤부터 인타민 월드와이드(INTAMIN WORLD WIDE)라는 회사의 한국지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새로운 회사는 테마파크 어트랙션(놀이기구) 전문 제작 회사였는데 한국 최초 목재 롤러코스터 티익스프레스의 설계, 제조사였다. 이런 사실은 차치하고 4대 보험 상실 취득 관계만 보자면 클라이언트였다 납품업체로 이직한 셈이었다. 3주 전에는 분명 출근 장소였는데, 지금은 업체 방문증을 끊고 들어가는 느낌이 꽤 기묘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난다. 일반 소비재도 아니고, 하나에 몇 백억 씩 하는 기계를 나사 하나부터 수입하고 한국에서 분해 조립하는 일을 따라다녔다.
당시는 그냥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꽤 신기한 일이었다. 놀이기구에도 카테고리와 업체별 전문 영역이 다 달랐는데, 당시 내가 속한 회사의 전문 영역은 주로 롤러코스터와 자이로드롭 (수직강하 기구), 자이언트 휠 (대관람차), 워터 라이드 그리고 모노레일 등이었다. 사실 입사 초반엔 뭐가 뭔지 너무 헷갈려 맨날 혼났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니 롯데월드 개장 시에 들어가 있는 놀이기구의 대부분은 이 회사 제품이라는 걸 예준이를 데리고 고객으로 놀러 가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한편으론 판매하는 제품이 놀이기구라는 것만 빼면 업무는 일반 회사원과 별반 차이 없기도 했다. 당시 연차가 너무 낮고, 업무 경력도 너무 짧아 큰 그림을 볼 수 없어서 그렇게 느꼈을 거다. 뾰족하게 기억나는 건, 이상하게 업무 외적인 것뿐이다. ㅎㅎㅎ
당시 고객사였던 **랜드의 동물원 호랑이 담당하는 과장님이 계셨는데, 유독 귀여워해 주셔서 새로 태어난 호랑이랑 사진 찍으라며 선뜻 호랑이 한 마리를 던져주신 게 제일 기억나고 또 하나는 라식수술이다.
당시 소프트렌즈 사용 불가할 정도로 안구건조증이 심해, 눈이 충혈되고 어쩔 수 없이 눈이 3/1로 줄어드는 효과를 주는 안경을 쓰고 다니던 게 업무 시작 후, 5개월 즈음되던 때였다. 어느 날 사장님이 200만 원을 통장에 넣어 주며 라식 수술하고 와서 일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가게 가서 아이스크림 사 오라는 말을 던지듯, 수술하고 와서 일하라는 말을 하셔서, 순간 멍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 규모가 아직 작아서 해줄 수 있는 건 많이 없다면서 그러지만 라식수술비는 지원했으니 결혼 축의금은 조금 절충하겠다.라고 농담도 덧붙이셨던 게 기억난다. 월급 안 밀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누구 뭐라 할 사람 없었을 텐데, 직원 눈 충혈된걸 다 챙겼을까 신기하고. 당시 안보이던 게 지금 보이며 당시보다 더 고마운 마음이 생기는 게, 또 신기했다.
지금 일하는 장소와 그 사장님 일하시는 사무실이 건널목 하나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우연히 만나 점심을 같이 먹게 된다. 올해가 일흔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고, 놀라운 것은 아직도 같은 장소에 같은 고객사와 일하고 계셨다. 거의 장인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역시 놀이공원이라는 곳도 오프라인이다 보니, 코로나의 여파로 쉽지 않은 2년을 보내신 것 같았다.
가장 힘드셨던 일이 무어냐, 은퇴는 안 하고 싶으시냐 이런저런 걸 남사스럽게 물어보기도 했다.
대전엑스포가 시작하던 시점, 놀이기구 6개를 파는 걸로 시작해서 지금 35년이 넘게 2500억 원 상당의 매출을 올렸는데 자기도 그걸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자기는 너무도 운이 좋게 호황기를 누리며 살았고 다만 지금 20~30대가 안쓰럽다 하셨다.
이런 감성 몰캉한 이야기를 하다가 야외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보며 안 써도 되는데 왜 쓰고 있냐며,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있어서 그렇다는 일침을 가하셨다. 갑자기 맥락 없이 노여움 타시는 것도 여전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예전만큼 그 노여움이 무섭지 않아 참 기분이 묘했다. 사장님은 사장님으로 오래 사셨으니 괜찮으시겠지만, 전 직원으로 산 인생이 너무 길어 노예근성이 있죠라고 의뭉스럽게 반박하고는.. 올해 하반기는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나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나의 무의식적인 말을 받아 사장님 말씀하시길.
하반기는 쳐다보지도 말라며, 그냥 오늘 지금 자신과 밥 먹은 이 시간 좋았으면 된 거라고 쿨한 현인처럼 한마디 던지고 길을 건너가셨다.
종종 전화해서 식사하자고 청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