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끼니
_살다 보면 몸이 축 늘어지고 마음까지 꺼져버리는 날이 있다. 기운이 없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사소한 말에도 짜증이 치민다. 그런 날 나는 퇴근길에 자연스럽게 짬뽕집을 떠올린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저 빨갛게 끓어오르는 국물이 간절해서다. 땀이 나도록 뜨겁게 속을 확 풀어내는 그 맛이 생각나는 순간. 내 발은 이미 짬뽕집 앞에 서 있다.
_어릴 때부터 짬뽕을 좋아했다. 또래 아이들이 단골처럼 짜장면을 시킬 때 나는 빨간 짬뽕을 주문했다. 어른들은 ‘애가 이런 걸 먹네?’ 하며 신기하게 바라봤고, 그 순간 나는 괜히 특별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런 반응이 좋았다. 나를 보통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짬뽕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된 지금까지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요즘도 가끔 짬뽕을 먹다 보면 그때의 자부심이 떠오른다. 특별한 아이가 되고 싶었던 마음은 사라졌지만, 짬뽕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면 여전히 그 기억이 은근한 웃음을 불러온다.
_짬뽕은 이름부터 귀엽다. ‘짬’의 장난기와 ‘뽕’의 둥근 울림. 음식 이름 중에 이렇게 귀여운 게 또 있을까. 떠올려보면 ‘푸팟퐁커리’나 ‘도리뱅뱅’ 정도가 있지만 ‘짬뽕’을 이길 수는 없다.
짬. 뽕. 두 글자가 만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어떤 사람이라도 둥글둥글하고 귀여울 것만 같다. 이름의 장난기와 달리 맛은 결코 가볍지 않다. 치명적인 반전매력이다.
_“짬뽕 하나요.”
이 짧은 말 한마디에 중국집 화구에 불이 붙는다. 한 그릇의 활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쓰린 속을 달래거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짬뽕을 찾는다. 주문이 들어간 뒤에는 바쁜 웍질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이어져 주방만의 리듬을 만든다. 그 소리는 마치 말발굽이 내달리는 듯 속도감 있고 일정하다. 한 그릇의 짬뽕이 태어나는 과정은 뜨겁고도 경쾌한 작은 축제 같다.
짬뽕을 만드는 일은 단순한 조리가 아니다. 화구는 강렬한 불길을 뿜어내고 웍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요리사의 등 너머로 불꽃이 형체를 바꾸며 춤을 춘다. 기름에 파와 양파가 닿아 지글거리고 고춧가루가 스며드는 순간 매운 연기가 식당을 가득 메운다. 날것의 매운 향이 달큰하게 변해갈 즈음 돼지고기가 합류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매운 연기 사이로 고소한 고기 기름 냄새가 스며들어 향의 층이 하나 더 쌓인다.
거친 불길에 볶이는 재료들. 열기의 최고조 때, 고춧가루가 타기 직전 육수가 구원자처럼 팬 속 재료를 살려낸다. 마지막으로 오징어를 시작으로 각종 해산물이 차례차례 들어온다. 바다의 짠내와 불의 뜨거움이 만나 국물 속에서 서로의 맛을 껴안는다. 이어지는 숙련된 웍질이 거칠고 다른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 조화를 이루고.
마침내 내 식탁 위 주인공이 등장한다. 짬뽕이다.
_짬뽕은 불과 물의 합작품이다. 센불에 볶아낸 재료가 육수와 만나 훌륭한 국물이 한층 깊어진다.
그렇게 완성된 한 그릇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슷한 기억을 불러낸다. 전날 과음으로 지친 직장인은 속풀이를 위해, 점심시간의 직장인 무리는 빠르게 배를 채우기 위해, 가족은 주말 외식의 즐거움으로 짬뽕을 찾는다. 가족이 함께 앉으면 짬뽕만으로는 부족하다며 탕수육 한 접시가 늘 곁들여지고 바삭한 고기 튀김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부어 함께 나눠 먹는 기쁨이 더해진다.
_처음 국물을 마실 때 나는 숟가락을 잘 쓰지 않는다. 숟가락에 담긴 한 모금으로는 늘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접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그대로 들이켜야만 짬뽕의 힘이 살아난다.
국물을 크게 들이켜면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고 입안은 얼얼하지만 먹다 보면 마음이 풀리고 몸도 가벼워진다. 짬뽕 앞에서는 누구나 안도의 숨을 내쉬고 소소한 행복에 미소를 짓는다. 뜨거움과 시원함, 혼자와 함께, 불과 물이 어우러진 한 그릇이 비워질 때 남는 것은 결국 조화가 빚어낸 기쁜 여운이다.
_지난겨울. 말 그대로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누구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었다. 유독 힘든 시기. 매일이 버거웠고 전에 몰랐던 어려움에 숨을 헐떡였다.
‘왜 이렇게 살지?’
바라지 않던 하루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원망하며 삶에 물음표를 띄운 어느 날 저녁. 나는 또다시 짬뽕집 문을 밀었다.
평소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짬뽕 한 그릇 앞에 앉아 첫 국물을 마셨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빨간 국물이 머금은 열기가 몸 안 어딘가에 크게 뭉친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것 같았다. 감기약을 먹고 나면 열이 내리듯. 짬뽕을 먹은 뒤 내 마음의 감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_아플 때 찾는 약처럼 마음이 아플 때 찾는 음식. 쓴맛 뒤에 단맛이 오듯 매운맛 뒤에 시원함이 오는 치유의 그릇. 그런 소중한 한 그릇이 내게는 짬뽕이다. 약은 맛이 없어도 효과만 좋으면 된다지만 짬뽕은 맛까지 좋으니 더할 나위 없다.
문득 어릴 적 나를 떠올린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빨간 짬뽕을 주문하며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했던 그 아이. 그때는 단순히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우월감이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이 아플 때 달려갈 곳이 어디인지를.
_사람마다 저마다의 빨간약이 있을 것이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달콤한 초콜릿, 시원한 맥주가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몸의 병은 약국에서 사는 약으로 낫지만 마음의 병은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해야 한다. 그날 그때의 저녁. 나에게는 그것이 짬뽕이었다.
지친 날마다 나를 보살핀. 내 마음의 빨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