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끼니
_순대는 속을 단단히 묶어야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 얇은 창자 껍질 안에 피와 당면, 채소가 들어가고 양 끝은 야무지게 매듭을 여민다. 그 매듭이 제대로 묶여야만 순대는 터지지 않고 우리가 아는 순대의 제 모습을 유지한다.
삶아진 뒤에는 속에 들어간 재료가 굳어 썰어도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껍질과 속이 달라붙어야 순대는 한 접시에 담길만한 음식으로 완성된다. 껍질만 있거나 혹은 속만 있어도 안 된다. 껍질과 속이 제대로 붙어 있지 않으면 순대가 아니다. 터지지 않고 온전한 모양으로 껍질과 속이 함께 묶여 제대로 삶아져 익어야 한다. 그래야 순대라고 할 수 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와 속을 익히고 감싸는 피가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모양과 맛이 붙어 순대가 된다.
_우리 아파트 앞에는 금요일마다 작은 줄이 생긴다. 순대트럭이다. 20년, 어쩌면 30년도 됐을 것 같다. 그 어릴 적부터 금요일은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 순대트럭이 오는 날이다. 처음 오던 사장님은 바뀌었다. 소문에는 돈을 제법 벌어 이제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지금 오는 순대트럭 사장님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고 들었다.
작은 트럭에는 가마솥을 닮은 커다란 찜통이 있다. 뽀얀 김을 토해내는 찜통 옆에서 사장님은 쪼그려 앉아 손님을 맞이한다. 커다란 칼을 쥐고 순대를 썰어내는 손길이 능숙하다. '제발 많이 썰어주세요'하는 마음으로 그 칼질을 바라본다. 능숙한 칼질에 통통한 순대가 잘려 나갈 때마다 얇은 피에 가득 찬 속은 터지지도 않고 잘 붙어 있는 게 신기하다.
_'제발 더 썰어주세요 여기서 그만 썰면 안 돼요.'
어릴 때 나는 차례가 되어 내가 가져갈 순대를 써는 사장님 앞에서 항상 속으로 조금만 더 썰어달라고 간절하게 빌었다. 사실 지금도 빈다. '한 점이라도 더 주세요'하고. 배고픈 상태에서 순대가 썰리는 걸 보고만 있으면 간식을 앞에 둔 개가 왜 침을 흘리는지 이해가 간다.
고소한 냄새가 공기 속에 흩어져 입맛을 돋울 때 사장님은 으레 이쑤시개 하나에 순대 한 점을 꽂아 건넨다. 유레카! 그 한 점이 참 별미다. 역시 음식은 그 자리에서 먹어야 맛있다. 뜨끈한 김이 입안 가득 번지고 순대의 고소함이 퍼진다. 한 점은 감질나고 아쉽지만 괜찮다. 지금 썰고 있는 순대가 포장되어 내 손에 들리면 집에 들어가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까.
_트럭 앞에서 줄을 서며 사장님이 순대를 써는 모습을 보면 나는 늘 순대 꽁다리에 눈길이 간다. 사장님은 순대를 꺼내면 꽁다리를 먼저 잘라내 무심하게 버린다. 질긴 걸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그 장면은 괜히 아쉽다.
껍질을 단단히 묶어 속을 붙잡아 두기 위해 꼭 필요한 자리. 그 매듭이 없었다면 순대는 애초에 제 모양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먹는 순간이 오면 꽁다리는 자주 남겨진다. 질기다, 맛이 덜하다며 버려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꽁다리는 버려진 게 아니다. 이미 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속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순대라는 이름을 끝까지 지켜낸 마지막 매듭. 그 덕분에 순대는 식탁 위에 오를 수 있었다. 꽁다리는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물러나는 것이다. 제 역할을 완수했으니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외롭고 심심한 날에 친구가 필요하다면 이제부터 버려지는 꽁다리를 향해 한 마디를 선물해주자. '꽁다리야 너가 순대를 완성했어. 너는 항상 순대를 순대로 만드는 마지막 매듭이야.' 때로는 빛나지 않는 한 조각이 전체를 지탱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힘 덕분에 우리는 한 접시의 순대, 하나의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_요즘 잘한다는 오래된 순대 가게에 가보면 풍경이 묘하다. 분주한 가게 분위기 가운데 순대를 묶고 삶는 이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다. 굽은 허리에 마디가 굳은 손. 세월만큼 주름이 늘고 몸이 불편해졌지만 여전히 야무진 손끝으로 속을 붙잡아내며 하루를 이어간다.
반면 손님석은 젊어졌다. 오래된 가게일수록 젊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만드는 이는 쌓인 세월만큼 늙어갔는데 즐기는 이들의 세대가 젊어졌다. 노포의 풍경은 이렇게 엇갈려 있다.
을지로의 산수갑산에 가보면 그런 경향이 더욱 선명하다. 한때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모여 국밥 한 그릇으로 속을 풀던 공간이었다. 젊은 사람은 전혀 찾을 수 없지만 나름의 활력을 갖춘, 수육을 가운데두고 탁주로 끼니를 대신하던 인생 선배님들의 오랜 사랑방이 지금은 대학생, 직장인, 때로는 외국인 관광객으로 줄을 잇는다. 노포는 여전히 노포지만 그 속을 채우는 세대가 달라졌다.
이 풍경은 단순히 맛집 하나가 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이 새것을 좇고 노포는 어르신들 차지였다. 이제는 다르다. 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낡은 간판과 오래된 맛을 찾아 기꺼이 노포를 향한다. 취향이 세대를 가르던 시대는 지났다. 나이로 취향을 재단하던 시절이 끝나가고 있다. 세대별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지금이다.
_과거에는 윗세대를 존경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와 경험이 그들의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손끝에 묻은 노동의 흔적, 한숨에 담긴 연륜이 곧 배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손안에서 수많은 지식을 얻는다. 영상 하나, 검색 몇 번이면 윗세대가 한평생 쌓은 경험을 요약한 듯한 정보가 쏟아진다.
이제 젊은 세대는 지식으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윗세대가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존경의 이유도 달라졌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존경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젊은 세대도 지식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우쭐할 건 없다.
모든 완성에는 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식을 완성하는 건 언제나 실천이다. 삶 속에서 자신이 아는 바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이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순대를 만드는 법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레시피나 만드는 법은 조금만 검색해봐도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노포의 주방에 연세 지긋한 그들이 여전히 있는 이유다.
알아도 행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우리의 윗세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묵묵하게 해냈다. '배운 게 없어 아는 게 없고, 할 줄 아는 게 고작 이것밖에 없다'는 겸손함이 멋있다. 시간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하루를 계속하는 그 성실함의 힘. 어떤 바보가 비웃을까? 그 모든 시간을 삶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하게 걸어온 티나지 않는 걸음에 찬사를 보낸다.
_작년 내내 나는 계획만 세우고 실행하지 못한 채 자책하던 시간으로 가득했다. 책상 위에는 메모와 노트가 가득했지만 실제로 이루어낸 것은 없었다. 머릿속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넘쳤다. 아직 남아 있는 창의력을 발견해 기뻤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생각이 머릿속에 머무르는 동안 손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휘발되고 게으름만 남았다. 나는 껍질만 남은 순대 같았다. 모양은 있는데 속은 풀려나 흩어져 버린 상태. 순대 꽁다리 같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떤 환경에도 풀리지 않을 단단한 매듭이. 국물 속에서도 풀리지 않고, 뜨거운 찜통 속에서도 항상 제 모양을 지켜내는 순대처럼 말이다.
_순대가 삶아지듯 삶을 살자. 뜨거운 국물에 오래 담겨야 제 맛을 내듯 삶도 시간을 견뎌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속을 단단히 묶어내는 일이다. 지식이라는 껍질 속에 실천이라는 피와 당면을 단단히 묶고 삶의 불 앞에서 오래 삶아질 때 비로소 삶은 모양을 갖춘다.
삶(Life)과 삶(Boil). 같은 소리를 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품은 두 단어가 순대라는 음식 안에서 하나로 겹쳐진다. 순대는 우리에게 말한다. 삶이란 지식으로만 완성되지 않는다고. 반드시 실천으로 묶여야 하고 시간을 견뎌내야 하니까 조금만 더 참아보라고.
삶기고 예쁘게 썰려 접시 위에 온전히 담긴 순대처럼. 무엇이든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완성된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끝난 건 아니다. 그저 우린 여전히 완성으로 향하는 과정 안에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