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한 잔, 그 너머에 기억 한 조각씩을 휘발시키며.

안녕. 안녕… [fiction or faction]

by Anselmo Gurnemanz

序.

오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싼 와인 한 병을 샀다. 머리부터 끝까지 메이드 인 코리아. 한국 최초의 와이너리인 경산 와이너리에서 양조한 마주앙 리슬링 한 병. 오늘은 이 녀석 한 잔을 벗삼아 머리 속에 얽힌 몇 가지 추억을 머리 속에서 저 멀리 떠나보낼까 한다.


1.

그녀는 지적(知的)이었다. 그녀는 말과 글에 관심이 많았다. 외국어를 가르치고 동시에 외국어를 배우고 있던 학생이었던 그녀는 만날 때마다 항상 읽을거리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그 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참 멋진 사람이었다.


언젠가 전화를 하던 중 그녀의 와인 취향에 대하여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스위트 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내가 즐기는 와인 중에 스위트 와인은 그 비중이 매우 적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 꺼내놓을 수 있는 비교적 괜찮은 스위트 와인 몇 종류는 가슴에 품고 있었다.


우리가 만나기 시작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던 그녀가 식사에 곁들일 음료로 와인에이드를 주문하였다. 비록 와인에이드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진짜 술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과 목 부분까지 붉게 변하고 말았다. 오후쯤에 학교 동기랑 만날 약속이 있다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같이 한동안 걸어다녔더니 홍조가 가셨다. 그녀에게 도수가 낮고 청포도향이 나는 와인을 같이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리 술에 약한 ○○씨도 쉽게 마실 수 있을 거예요." 그녀도 꽤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 날 뒤로 정확히 4주 후, 그녀는 내 품을 떠났다. 물론 그 사이에 내가 그녀와 함께 와인을 마실 만한 시간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 지금까지 그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기억을 와인 한 모금에 떠나보낸다. 안녕.


2.

그녀는 속칭 '이대 나온 여자'였다. 그녀는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바로 '애증'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또한 사랑했던 것만큼 미워했다. 하지만 '미움'보다는 '사랑' 쪽이 전체적으로 우세했던 것 같다. 적어도 그 날에 있던 일을 생각하면 말이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비가 내렸던 어느 늦겨울날, 나는 어떤 고급 음식점에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 앉았다. 테이블에는 치즈 몇 조각과 껍질에 붙어 있는 생굴 몇 조각이 있었다. 나는 여기에 중간 정도 가격대의 샤블리 한 병을 곁들여 보았다. 샤블리와 굴의 조합은 상당히 좋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그녀는 다소 망설이는 것 같으면서도 나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가 된 이후의 어느 저녁 시간, 나는 이 날을 추억하며 그녀에게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샤블리보다 더 좋은 와인을 서빙하겠노라고.


하지만 그 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녀에게 와인을 서빙해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날의 일을 또다른 와인 한 모금에 떠나보낸다. 잘 가라.


3.

그녀는 도도했다. 그리고 섹시했다. 그녀는 속칭 '명품'에 관심이 많았고 '이대'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틈틈히 회자하곤 했다.내가 그녀에게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코흘리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잠시 떠나보내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샹빠뉴 한 병을 샀던 기억이 난다. 종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플룻 글래스 안에 샹빠뉴를 세 번에 나누어 따르면 그 안에는 2만 개의 별들이 떠오른다고 한다. 2만 개의 별들이 만들어내는 도도함과 상쾌함. 그것이 바로 샹빠뉴의 매력일 것이다.


나는 그녀의 도도함에 어울릴 만한 샹빠뉴 한 잔을, 여름 어느 날에 그녀에게 서빙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나에게 영영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준비해 둔 샹빠뉴는, 아마도 어느 가을날에 오픈되어 어머니께 서빙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그 샹빠뉴 한 잔을 마시고, 두어 시간 후에 차를 몰고 어느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악을 쓰고 내려왔다. 후련했다.


하지만 나의 무의식 깊숙하게 침투해 있었던 그녀의 이미지를 지워내는 데는 그 후로 2년도 넘게 걸렸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기억을 또다른 와인 한 모금에 떠나보낸다. 안녕.


4.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만났던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애교가 있었다. 나랑 정말 죽이 잘 맞았던 그녀는 최고의 연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정말 죽이 잘 맞았던 우리는 심각하게 부부의 연을 맺는 것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우리, 아이 가질까?" 그 날은 내가 커플 초청을 받아서 참석했던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택시를 타고 한참이나 산을 올라갔다. 산 위에 있는 일급 호텔에서 꽤 괜찮은 와인이 곁들여진 프렌치 정찬을 먹으며 산 아래에 펼쳐진 야경을 보았던 것은 멋진 경험이었다. 나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그 날 이후 시간이 꽤 지났고 그녀는 나의 아이를 가졌다. 아이가 생긴 시기가 썩 좋은 시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그녀의 배 안에서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유산되었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시점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또다른 와인 한 모금에 그 때의 행복하고 슬펐던 시간을 떠나보낸다. 잘 가라.


結.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와인 한 모금을 마신다. 시면서도 달고, 감미로우면서도 쓰다. 마지막 한 잔의 와인과 함께 지난 밤에 만들어놓은 삶은 닭가슴살 조각을 베어 문다. 짭조롬하면서 마늘의 뉘앙스가 난다.문득 후추의 희미한 매운 맛과 단백질 특유의 비린 느낌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면서 입에서 식도로 넘어간다. 시고, 달고, 쓰고, 짜고, 매운 것.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린 느낌.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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