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썩이던 관용구, 재밌게 잡아보자 (2)
고딩 때 "숙어는 화수분이다"란 얘기를 해준 영어샘이 계셨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가 전영택의 단편소설 〈화수분〉(1925)을 읽은 터라 '화수분'이란 게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고 끝도 없이 재물이 쏟아져 나오는 보물단지를 가리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숙어(idiom)가 화수분이라니? 말 그대로 '뭥미?'였다.
일단 '화수분'이란 말부터 분석해보자. 물건을 담아 두면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전설 속의 항아리 '화수분'은 보통 사치와 방탕을 경계하는 용도로 쓰인다. “그렇게 쓰다간 화수분도 못 당하지,”라는 식으로.
貨水盆 (재물 貨, 물 水, 그릇 盆)
재물이 샘물처럼 솟는 그릇 혹은 항아리
동양의 '화수분'과 매우 비슷한 항아리가 서양에도 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예언가 엘리야(Elijah)가 신의 뜻에 따라 위험을 피해 사르밧(Zarephath)이란 이방지역에서 숨어지내던 중에 어린 아들과 함께 사는 가난한 과부를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화 속에 등장하는 '과부의 항아리'가 바로 '화수분'이다. 자세한 얘기는 구약성서 '열왕기' 제17장에 나온다.
widow’s cruse
과부의 항아리(성경에 나오는, 무진장의 원천)
* widow 과부, 미망인 ↔ widower 홀아비
* cruse [krú:z] 병, 항아리 = jar
영어에서 숙어(熟語:idiom)가 마치 온갖 재물이 나오고 또 나오는 화수분과 같은 존재라는 고딩 때 영어샘의 말씀은, 같은 뜻의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 대신 몇 개의 단어들이 결합해 이뤄진 숙어를 사용하는 영어권 사람들의 말하기 습성을 빗댄 표현이었다. 실제로 숙어 공부를 하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외우나 싶을 정도로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숙어의 빈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유명한 문학작품으로 한번 확인해보자.
19세기 미국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의 첫 장편소설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밀려들던 17세기의 보스턴(Boston)을 배경으로 보수적인 청교도 사회를 그린 이 작품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특히 종교의 폭력을 치밀한 구성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지금도 널리 읽히는 소설이다. 그 첫 대목이다.
One quiet, rainy day I made a discovery – a small package wrapped in old paper. The object that most caught my attention was a bit of fine red cloth decorated with gold. It was the capital letter A. I happened to place it on my chest. I felt my burning chest – as if it were not red cloth, but red-hot iron. I trembled and let it fall to the floor. I examined the papers to find the story that lay behind this strange letter.
비가 내리는 어느 조용한 날, 나는 오래된 종이에 감싸인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발견했다. 가장 강하게 내 눈길을 잡아끈 것은 금빛으로 장식된 고급스런 붉은 헝겊 조각이었다. 그것은 알파벳 대문자 A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가슴에 대보았다. 그러자 가슴이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건 마치 붉은 헝겊조각이 아니라 벌겋게 단 쇳덩이 같았다. 나는 손을 떨며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이상한 글씨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서류들을 뒤져본 뒤였다.
* make a discovery = discover 발견하다
* wrap in ~로 싸다 / (be) wrapped in ~로 싼
* catch one’s attention ~의 관심을 사로잡다
* decorate with ~로 장식하다, 꾸미다
* a bit of 한 조각의, 소량의
* happen to ~ : 우연히 ~하다
* place ~ on one’s chest : ~을 가슴에 대보다
* as if it were (실제 일어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처럼
* lie behind ~ : ~ 뒤에 (진짜 이유가) 숨어 있다
숙어는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와 전치사로 구성되어 있어서 얼핏 보면 어려울 게 없을 듯싶지만 그 수가 너무도 많아서 눈에 익숙하지 않으면 정확한 뜻을 알기 힘들다. 결국 많이 보는 수밖에 없는데, 유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뻔히 아는 단어들이 모여 있는데 왜 이런 뜻이 되는 거야!”라고 짜증을 내면 안 된다는 것. 숙어도 단어와 같아서 눈과 귀로 많이 익혀서 그 뜻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다만, 숙어를 익히는 요령이 있다면, 쉬운 단어들이 모여 있다고 뜻을 대충대충 유추하지 말고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Her agency came up with an idea to make a big star who would represent Asia.
그녀의 소속사는 아시아를 대표할 대형스타를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 came up with ~ : ~을 생산하다, 제안하다
▶ came up with an idea 생각해내다
숙어를 공부하면서 몇 번 낭패를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늘어놓는 불평이 있다. “대체할 단어가 있는데도 왜 굳이 숙어를 쓰는가,”라는 것. 위에 든 예문에서도 ‘came up with’는 ‘think’의 과거형 ‘thought’를 쓰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영어권 사람들은 굳이 숙어나 관용구를 사용하는 것일까? 이유는, 단어보다 숙어를 쓰면 전하려는 뜻이 좀 더 풍부해지고, 섬세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위의 think와 come up with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come up with를 분석해보면 think와의 차이를 느낄 수가 있다.
come up with는 〈come up + with〉의 형태로 되어 있다.
come (오다) + up (위로) = 위로 나오다, 솟다, 움트다, 떠오르다
* The roses are just beginning to come up.
장미들이 막 움이 트기 시작했다.
* I'm afraid something urgent has come up.
뭔가 긴급한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된다.
come up + with (an idea)
아이디어가 떠오르다 = 생각해내다
* He tried hard to come up with an idea, and put all his efforts into it.
그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려고 애쓰며 모든 노력을 거기에 쏟아 부었다.
귀찮거나 성가시다고 숙어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영어권 사람들이 일반단어보다 숙어를 훨씬 더 많이 쓰기 때문이라는 게 한 가지 이유고, 다른 하나는 일단 알아놓기만 하면 활용빈도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가령, come up with an idea를 알고 나면 다음 예문의 의미도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come up with a way
방법을 찾아내다
come up with a remedy
타개책을 마련하다
come up with a new concept
새로운 개념을 고안해내다
* remedy 대책, 해결책 = cure, treatment, solution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음으로 불구하고 굳이 숙어를 활용해 풍부하고 섬세한 표현을 드러내는 건, 언어사용자가 가진 일종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언어는 생물이다"란 말도 있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식당에서 주방일 하며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려고 할 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란 표현은 그저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보다 절박함을 훨씬 잘 드러낸다.
She is living with the dishes at a restaurant.
그녀는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She earns a living by washing dishes at a restaurant.
그녀는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 earn a living by ~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다
여기에 절박함을 더 부각시키고 싶다면 ‘힘겹게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라고 표현하면 된다.
She earns a meager living by washing dishes.
* meager [mí:ɡər] 메마른, 풍족하지 못한
참고로 earn a living에서 earn 대신 get이나 make를 사용해도 같은 뜻이 되며, 부정관사 a 대신 주어의 목적격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She makes her living by washing dishes.
She gets her living by washing dishes.
숙어에 대해 모두 설명을 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겠지만, 공부하는 사람으로는 결국 문장을 많이 보고 읽어서 숙어와 친숙해지는 방법 밖에는 도리가 없다. 사실 우리는 아주 익숙해서 미처 숙어란 생각이 들지 않는 숙어들도 많이 알고 있고, 비슷한 상황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숙어들도 꽤 많이 알고 있다. 가령, 잠에서 깨어나거나 침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만 해도 10여 개는 되고, 우리는 이를 거의 모두 알고 있으며, 설사 본 적이 없다 해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He always gets up early.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난다.
Nobody was around when I woke up after a long sleep.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As your pet makes noise, it could wake you from a peaceful sleep.
애완동물이 소리를 내면 달콤한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다.
He awoke out of a sound sleep.
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get up’ ‘wake up’ ‘wake from sleep’ ‘awake out of sleep’ 등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다는 뜻의 fall out of bed도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는 의미로 쓰이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는 뜻의 sit up in bed도 잠을 자고 일어나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We had no choice but to wait until he fall out of bed.
우리는 그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 ‘but’은 절과 절을 잇는 접속사로 ‘그러나’의 뜻으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위의 예문에서처럼 전치사로 ‘~외에/~밖에’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She barely had the strength to sit up in bed.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을 만큼의 힘도 거의 없었다.
* barely 간신히, 겨우, 가까스로
자꾸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내 것이 된다는 건, 당연하다. 숙어와 친해지는 것이 곧 영어와 친해지는 지름길이다(Being familiar with idioms is a shortcut to becoming familiar with Engl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