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읽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대중의 반역》에서 20세기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특색을 고찰하였다. 대중이 완전한 사회권력으로 등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유럽인의 의식과 삶의 특색을 살핀 것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2005) 1판 5쇄(2015)를 기본으로 하여 이를 살펴본다(인용문의 쪽은 이 책의 쪽을 의미한다).
오르테가에 따르면 현대인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잠재력을 느끼면서 모든 과거를 시시한 것으로 취급한다. 현대인은 자신이 과거의 다른 어떤 시대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색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더구나 현대인은 과거 전체를 간과함으로써 고전적·규범적 시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은 과거의 모든 시대보다 우월하기에 그곳으로 되돌아갈 필요 없는 새로운 삶이라고 인식한다. [61] 이렇게 인식하게 된 요인으로 오르테가는 20세기 들어 잠재력 측면에서 인간의 삶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 엄청난 가능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그 가능성은 삶의 확장에서 온다.
엄청난 능력을 지녔지만 이상이 없는 현대인
먼저 공간적인 확장이다. “오늘날 평균인의 삶의 내용이 전지구와 관계하고 있으며, 각 개인은 언제 전 세계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다.”[53] 또한 세계는 시간의 관점에서도 확장되었다. 선사학과 고고학은 역사 영역을 환상적인 세계에서도 발견해 왔다. 속도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게 됨에 따라 시간과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어 생활에 유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로 인해 “욕망과 노력, 제조와 파괴, 만남과 향유 내지 거부, 곧 모든 생명 활동들”이 확장되었다. 구매 행위를 보면 현대의 구매자에게 주어진 가능성은 실로 무한대에 가깝다. 지적인 면, 직업, 유희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체력과 스포츠에서도 알려진 과거의 수준보다 오늘날의 기록이 월등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번한 기록 경신이 현대인에게 “인간의 신체 조직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우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과학에서도 일어난다. 주체적 잠재력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과학의 성과를 눈으로 볼 수 있다. “영화와 화보가 아주 멀리 떨어진 지구의 모퉁이들을 평균인의 눈앞에서 보여주듯이, 신문과 대담은 진열장을 차지하고 있는 최근 발명된 장치들이 입증해 주는 지적 성과들을 그에게 소개해준다.”
이 모든 것이 평균인의 마음에 가능성이 엄청나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이렇게 양적이거나 잠재적인 측면에서 삶의 진보와 확장을 보는 “현대인은 어느 때보다 더 큰 잠재력을 느끼면서 모든 과거를 시시한 것으로 취급한다.”[60]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은 “이상을 실현할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긴 하지만 무슨 이상을 실현해야 할지는 정작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은 자산과 지식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행한 시대처럼 표류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현대인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힘과 불안이라는 특이한 이원성”이라고 오르테가는 지적한다. 현대인은 모든 재능을 다 갖추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활용할 재능은 없는 처지에 있다. 대중은 이러한 상황에 있다.
대중의 반역 이면에 있는 지도하는 소수의 배임
그럼 지도하는 소수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끊임없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불확실성을 느낄 것이다.”[63]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는 지도하는 소수이다. 대중은 “자신의 실존을 조율할 수 없는” 존재이다. 지도하는 소수는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고자 하기 때문에 일종의 불안을 느끼고 그래서 항상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고 오르테가는 진단한다. 19세기와 같은 ‘절정의 시대’라는 확신은 일종의 시각적 환상에 불과한데, 이 환상이 미래에 관심을 소홀히 하도록 하여 그 결과 모든 시대의 방향성을 우주의 메커니즘에 맡기게 된다. 바라던 정상에 도달하여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확신했으니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진보적 자유주의자도 자신들이 바라는 최상의 미래는 천문학상의 필연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실현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이러한 이념에 도취되어 역사의 키를 놓고 긴장을 늦춘 채 민첩성과 효율성을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삶은 그들의 손을 벗어나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64] 오르테가는 대중에게 “산다는 것이 매 순간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부표 같은 것이어서, 그들은 완전해지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21]라고 하였다.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바로 대중과 같이 표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어떤가? “진보주의자는 관대한 미래주의자라는 가면을 쓰고서 정작 미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미래에는 놀라움도 비밀도 없고 중대한 사건도 본질적인 혁신도 없다고 다짐하고, 세계는 우회나 후퇴 없이 앞으로만 전진한다고 확신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고 현재라는 시점에 안주한다.”[64]
이렇게 마르크스 사회주의자와 진보적 자유주의자는 역사의 키를 놓고 긴장을 늦추어 민첩성과 효율성을 상실하고, 진보주의자는 미래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세계가 계획도 기대도 이상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준비하는 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지도하는 소수의 배임이며, 이는 대중의 반역 그 이면에서 항상 볼 수 있다고 오르테가는 지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