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은 너희의 삶을 위한 제물이 될 지어니

태초의 이야기 <길가메시 서사시>로 본 영웅의 모습

by 구름잡이

최초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


전설적인 우룩의 왕 길가메시는 신들의 아름다움, 용기와 강한 힘을 물려받은 반신으로 만들어졌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오만방자하여 우룩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그들의 여인을 빼앗았다.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우룩의 신 아누에게 간청하자, 아누는 창조의 여신 아루루를 통해 엔키두를 만들어 길가메시와 대적하도록 한다. 자연의 품에서 태어난 엔키두는 순진하여 짐승들과 지냈는데, 사랑의 신전의 창녀와 몸을 섞고 나자 동물들은 그를 피했고, 지혜로워진 엔키두는 우룩에 도착해 길가메시와 대등하게 힘을 겨룬다. 무릎을 꿇은 길가메시와 주저앉은 엔키두는 서로를 인정해 입을 맞추고 둘은 친구가 된다.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생명의 나라의 향나무 숲으로 가 그곳의 산지기 훔바바를 무찌르고 신들의 신전을 세웠다. 길가메시에게 반한 사랑과 풍요의 여신 이시타르는 그에게 구애를 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이 받은 혹독한 시련을 잘 알고 있던 길가메시는 그녀를 모욕한다. 분노한 이시타르는 하늘의 황소를 우룩으로 보내 길가메시와 엔키두를 공격한다. 하지만 둘은 황소를 제압해 죽이고, 이시타르는 그들을 저주한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우룩의 영웅이 된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신들은 회의하여 엔키두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둘도 없는 형제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위해 통곡한다. 죽음이 두려워진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기 위해 ‘머나먼 곳'이라 불리는 우투나피시팀을 찾아 나서게 된다. 길가메시는 들과 광야를 방황하고, 스콜피온이 지키고 있는 마슈 산맥의 어두운 지하세계를 지나, 신들의 동산에 도착해 포도주를 만드는 여인 시두리를 만난다. 긴 여행으로 인해 쇠약해진 길가메시에게 그녀는 필멸의 운명을 받아들여 모험을 포기하고 쾌락을 좇으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포기할 마음이 없는 길가메시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해 뱃사공 우르샤나비를 찾아가 바다를 건너 우투나피시팀에게 도착한다. 우투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태초의 홍수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우투나피시팀은 길가메시가 여섯 날과 일곱 밤을 잠들지 않고 버티면 신들의 비밀을 가르쳐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길가메시는 도중에 잠들어버리고 만다. 허무하게 돌아가려던 찰나에 우투나피시팀의 아내는 길가메시가 떠나기 전 선물을 주자고 제안하고, 우투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영생의 식물이 있는 장소를 가르쳐준다. 영생의 식물을 찾은 길가메시는 우룩에 돌아가 이것을 노인들에게 나눠줄 것을 기약하지만, 그가 목욕을 하는 중에 뱀에게 식물을 도둑맞아버린다. 그렇게 긴 여행 끝에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길가메시는 이 이야기를 돌에 새겨 후대에 전달하고 나이가 들어 죽음의 운명을 맞이한다.


sina-hayati-gilgammesh-resized.jpg 길가메시와 엔키두. 출처-Gilgamesh and Enkidu. Sina Hayati (Art Stations)


영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영웅 서사의 ‘구조'에 대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조지프 캠벨의 명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1949)에 나타난 영웅의 여정(monomyth)이나, 시드 필드가 그의 저서 <시나리오란 무엇인가>(1979)를 통해 현대적으로 재정립한 서사의 ‘3막 구조(three-act structure)’ 등은 우리가 대중매체에서 만나는 이야기 속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에 대한 진행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아직 온전히 영웅이 되지 못한 주인공이 있고, 모험의 부름을 받는다. 모험은 시련의 길이고, 그는 그 길을 가기 위해 조력자의 도움을 받는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시련을 이겨내고, 귀환한 주인공은 영웅으로 성장해 있다. 이런 서사의 구조는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과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이는 인류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된 것으로, 오늘날의 이야기들은 결국 같은 구조의 반복적인 변주(變奏)라는 것이 핵심 골자다. 따라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영웅 설화, 혹은 다윗이나 모세 등 성경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J. R. R. 톨킨의 호빗이나, 해리포터 같은 더 현대적인 이야기에서 소개되는 인물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영웅 이야기가 원형적인 어떤 구조가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영웅’이란 무엇인가? 모험에 대한 소명이 주어지고, 시련의 길을 거쳐서, 그 끝에 도달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구조 자체가’ 영웅을 정의하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명인 것 같다. 영웅 서사의 구조가 시간의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구조가 살아남게 한 원동력은 따로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영웅을 정의하는 그 요소에 대한 탐구이며, 그것이 반영된 영웅의 삶이 구조화되어 서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탐구다.


우선, 구조 그 자체를 보자. 구조(structure)라는 단어는 불변성을 암시하는 것 같다는 함정이 있다. 하지만 이야기가 구조를 지닌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주인공, 영웅이 존재한다. 그리고 주인공을 있게 하는 상황(context)이 있다. 상황은 구조가 아니다. 영웅은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상황을 만들어 나가고, 그 상황과의 상호작용을 거치는 과정에서 이야기의 구조가 나타난다. 길가메시는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선택지에 놓인다.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태어난 그는 그의 힘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는 남의 여인을 취하고, 쾌락을 위해 젊음을 소비한다. 괴물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지만, 죽이는 것을 선택하고 명성을 얻는다.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기로 선택한다. 이런 선택들은 그를 모험으로 이끌고, 이야기의 시작, 중간과 끝을 구성하게 된다. 즉, 주인공은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선택들의 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구조는 고고학적 유물처럼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외현으로 나타나는 서사의 구조만이 영웅을 정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핵심은 그가 내리는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함의하는 가치에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초반을 보면, 길가메시는 오만하여 힘을 멋대로 쓰고, 쾌락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에 백성들은 불평한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종을 울린다. 그의 방자함은 밤낮으로 끝이 없구나… 그러나 그가 바로 슬기롭고, 관대하고, 단호한 도시의 목자란다.”


이것이 길가메시의 구태(舊態; status quo)이다. 그의 행태는 일반적인 영웅상(英雄相)—이 시점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의 내릴 수는 없을지라도—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역시도 분명히 길가메시의 선택에 의한 결과다. 그는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났고, 자신을 견제할 사람이 없었으며, 그리하여 힘을 남용했다. 이는 그를 불완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그가 가장 인간적인 형태에서 모험을 시작하게 한다. 길가메시의 불완전함을 나타내는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죽음이다. 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길가메시이지만, 그 역시도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유한한 존재다. 우투나피시팀이 길가메시에게 말한다.


“재판관 아눈나키가 와서 운명의 어머니 맘메툰과 함께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인간에게 삶과 죽음을 주었으나 죽음의 날짜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길가메시의 오만함은 자신의 운명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명성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찼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나는 운명이 결정한 대로… 향나무가 가득 찬 곳으로 가겠다. 그리고 유명한 영웅들의 이름이 새겨진 곳에 내 이름을 새길 작정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겁쟁이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말라… 우리 함께 숲 속으로 들어가자. 용기를 내어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자. 죽음일랑 잊고 나를 따르라...”


흥미로운 점은 이야기의 초반에서 나타난 이 불완전함이 길가메시를 모험으로 이끄는 원동력, 즉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무지함과 그로 인해 내린 선택들이 엔키두와의 우정을 만들었고, 괴물 훔바바를 베었으며, 하늘의 황소를 무찔렀고, 결과적으로 엔키두의 죽음을 초래한다. 또한, 불완전성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엔키두의 죽음 이후 영생에 대한 갈망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었다. 즉, 심경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태도의 변화가 의미 있기 위해서 시작점은 불완전함에서 시작되어야만 했다. 실제로, 엔키두가 죽고 난 후의 길가메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나의 동생으로 인해 나는 죽음이 무서워졌다. 나의 동생으로 인해 나는 광야를 헤매게 되었다. 그의 운명이 내게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그러니 어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어찌 조용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먼지가 되었고 나 역시 죽어 땅 속에 영원히 묻히게 될 것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다시 원동력으로 작용해 이야기의 후반부를 이끌어간다. 결국, 초반의 길가메시의 모습은 이런 극적인 변화를 위한 필연적인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인간적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 운명을 인지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그것이 길가메시의 안에서 강한 진동을 일으키기까지의 변화는 그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는 길가메시가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성장하는 영웅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시화되었다는 점이 어째서 성장일까? 길가메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심지어 영생을 위한 모험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강력했던 그의 신체도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초반의 불완전함이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면, 후반부에서는 스스로가 한없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는 데에서 오는 불완전함이다. 하지만 이 변화를 성장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차이가 전혀 다른 선택지를 가져오기 때문이고, 이는 곧 전혀 다른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힘의 과시와 명성, 그리고 쾌락주의적인 선택에서 영생에 대한 추구와 운명의 거역을 길가메시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에서 더 높은 차원의 선택이다. 후자의 경우가 더 고차원적이라는 것은 텍스트에 잘 드러나 있다. 우투나피시팀을 찾는 여정에서 만난 포도주를 만드는 여인 시두리는 길가메시에게 말한다.


“길가메시여, 어디로 급히 가려하십니까? 당신은 생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에게 죽음도 함께 붙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만은 그들이 보살피도록 남겨 두었습니다. 길가메시여, 당신에게 충고를 드리죠.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십시오. 낮으로 밤으로, 밤으로 낮으로 춤추며 즐기십시오. 잔치를 벌이고 기뻐하십시오. 깨끗한 옷을 입고 물로 목욕하며 당신 손을 잡아 줄 어린 자식을 낳고, 아내를 당신 품 안에 꼭 품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밤낮으로 춤을 추며 쾌락을 좇으며 번식을 하다 생을 마감하는 운명은 인간에게 죽음이 필연적인 것과 똑같이 신들이 만들어놓은 한계였다. 일부 원전에서 시두르가 이시타르의 또 다른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국 이 장면은 신이 피조물에게 ‘너의 자리를 지키라'며 현실을 깨우치도록 주의를 주는 장면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길가메시가 내리는 선택은, 내 생각에 가장 근본적으로 영웅을 정의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대답한다.


“사랑하던 엔키두가 먼지로 변했는데, 그리고 나 또한 죽어 땅속에 묻힐 텐데 어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잠자코 있을 수 있겠는가? ... 젊은 여인아, 우바라투투의 아들 우투나피시팀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일러주지 않겠는가? 그 길을 갈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오! 제발 좀 알려다오. 갈 수만 있다면 대해라도 건너겠다. 만일 갈 수 없다면 나는 다시 계속 광야를 헤맬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길가메시의 일차적 동기는 친구의 죽음이다. 그는 자신만큼이나 육체적으로 강했던 엔키두의 죽음을 목격하고, 자신 또한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운명에 거역하기 위한 선택을 한다. 바로 인간의 운명을 이겨낸 우투나피시팀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시두르에게 그를 찾을 수 있는 ‘방향'과 ‘방법'을 묻는다. 이것은 지혜를 의미한다. 과거의 길가메시에게는 모두가 자기의 발아래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은 뒤로는 겸손함을 찾아,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어간 자의 지혜를 구한다. 그리고 난관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표출한다. 바로 여기에서 성장의 요소가 나타난다.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깨우침(겸손함), 그럼에도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성장(지혜를 구함),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자세다(운명에의 거역). 이것이야말로 영웅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불완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자세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구조에 대한 논의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영웅이 ‘내적 성장'을 통해 만들어진다면, 이는 ‘과정'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구조 자체가 영웅을 정의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영웅 서사의 구조가 그 원형을 유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살아남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변주를 해도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그 구조를 만들어내는 내현적인 원동력이 변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불완전함과 그것을 포용하는 자세, 그리고 성장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인간상이 원형으로 그려지는 것이 영웅인 것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복제되어서 전달되기 때문에, 이것을 담고 있는 그릇, 즉 서사의 구조의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다.


전달의 의미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서 빠져있는 핵심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영웅의 삶은 어떠한가? 정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영웅 다움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갈 필요가 없다. 끝내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지 못했다. 그의 운명에 거역하지도 못했다.


“운명의 침대 위에 그는 누워 있으니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 오색의 그 침상으로부터 다시는 일어나 나오지 않으리.”


‘결국 그는 영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결말 자체만 놓고 봤을 때에는 비관적으로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는, 언젠가는 엔키두의 죽은 몸처럼 벌레가 내 몸도 파먹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삶 그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낙관적 허무주의의 태도로도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의 경우를 택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로 이런 영웅 서사가 오랜 시간 동안 되풀이되어왔다는 점을 들고 싶다.


<길가메시 서사시>와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인간의 태생적 무력함을 예로 들 수 있다. 당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복하지 못하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이심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자연을 상징하는 신들과 자연의 아들로 태어난 엔키두에 대한 묘사에서 알 수 있다. 우투나피시팀의 홍수 이야기 중, 그는 신들을 “똥개", 내지는 “파리 떼”로 비유한다. 이는 홍수와 같은 대재앙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신들이 동시에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태도 가지고 있는지를 얄궂게 표현하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그 자연을 관장하는 신들 역시 숭고하기 만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영생의 힘을 가진 그들 앞에 인간은 무능하다. 또, 엔키두라는 캐릭터를 보면, 이야기 초반에는 문명화되지 않은 순진한 상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여자를 알게 되고 술과 빵을 먹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동물들이 가까이 오지 않는 대신 지혜로워진다. 자연의 상태를 순진함, 내지는 무지함으로, 그리고 문명화된 이후를 ‘지혜로워진’ 상태로 표현한다. 이는 자연을 정복하고 싶은 당대의 집단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길가메시의 모험은 자연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즉, 이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는 영웅이란, 타고난 한계를 극복하려는 자세에서 오는 것이다.


둘째로, 한층 더 인간 보편적인 가치를 이야기에서 찾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협동심과 같은 것이다. 길가메시의 모험에는 늘 엔키두가 함께 있었다. 엔키두가 죽고 난 뒤에도 길가메시는 스스로의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이들의 지혜를 끊임없이 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범위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타심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야기의 후반에 영생의 식물을 찾은 길가메시는 이렇게 말한다.


“이리 와서 이것을 좀 보라. 진기한 식물이다. 이 식물은 사람들에게 지난날의 젊음을 되찾아 줄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강한 성 우룩에 가져갈 테다. 거기서 이것을 늙은 사람에게 먹이겠다. 이 식물의 이름은 ‘늙은이가 다시 젊어진다'로 불릴 것이다. 그리고 나도 이것을 먹고 잃었던 젊음을 다시 찾을 것이다.”


여기서 길가메시는 처음으로 남들을 위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정을 통해 초반의 무지함과 오만함에서 벗어난 길가메시는 내적 성장과정을 거쳐 남들을 위할 줄 아는 위인으로 변신했다는 뜻이다. 나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볼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점이 인류의 핵심가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주제는 이야기의 서두에서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다음 문단과 함께 시작한다.


“지금부터 길가메시의 행적을 알리노라. 그는 모든 것을 알았고, 세상 모든 나라를 알았던 왕이다. 슬기로웠으며, 신비로운 사실을 보았고, 신들만 알던 비밀을 알아내었고, 홍수전에 있었던 세상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었도다. 그는 긴 여행 끝에 피곤하고 힘든 일에 지쳐 돌아와 쉬는 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돌 위에 새겼노라.”


이는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협동심과 이타심은 주체를 개인이 아닌 단체, 집단으로 보는 관점이다. 인간은 무능력하고, 자연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다. 하지만 뭉치면 강하다. 돌 위에 이야기를 새기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 역시 이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길가메시가 신들로부터 지혜와 힘을 물려받았듯이, 그 역시 그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지혜를 후대에 전달한다. 그리고 자신은 겸허히 운명을 받아들여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그는 죽은 것이 아니다. 육신은 사라졌으나 그의 영혼은 죽음을 극복했다. 바로 여기에 영웅의 삶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 길가메시가 끝내 영생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고 할지라도, 그의 이야기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가기 때문이다.


영웅 서사를 다룰 때 그 구조가 언급되는 이유는 영웅을 정의하는 요소들이 내적 성장의 과정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웅은 불완전한 상태로 우리에게 소개되고, 그 불완전함을 탈피하기 위한 과정이 곧 모험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결과와는 별개로 ‘추구해야 하는 삶'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이렇게 영웅은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서의 의미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웅의 삶, 즉 이야기의 구조가 중요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정의가 다소 상투적인 낙관론으로 비칠 수는 있다. 표면적으로는 낙관적인 것이 맞다. 하지만 영웅의 원형이 인류 문명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영웅의 삶에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가치들이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아예 근거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인간 보편적인 가치들이 상징체계를 형성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영웅의 원형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은 현대인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길가메시 서사시>의 텍스트는 N. K. Sandars 저(이현주 옮김)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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