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출근
합격 연락을 받은 건 면접 바로 다음날 아침이었다.
사실 면접 당일에 대표님이 바로 계약을 하자고 하셨는데, 옆에 계신 팀장님은 그래도 하루는 있어봐야 한다며 다음날 연락드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실무자인 팀장님이 능력 부족으로 나를 탈락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합격 전화를 받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내 입장에서는 면접을 썩 그렇게 잘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다음 면접에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어떻게 말해야겠다...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왜 붙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차차 기회가 되면 여쭤보고 싶다.
내 기본 스펙을 잠깐 말씀드리자면 문화산업 전공에 UIUX 부전공을 했지만 학과명이 디자인이랑은 관계가 없어서 디자인 부전공인지 말하기 전까지는 모르고, 지금 회사도 몰랐다.
문화산업을 전공하다 군대에서 머리가 돌아서 디자인으로 전향했고 나름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약 1년 반 가량 교내 접근성 UX 연구실에서 학부연구생으로 활동하면서 스펙을 쌓았다. 올 7-8월에는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주최하는 소프티어 부트캠프 4기에 운좋게 붙어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다. (내가 알기론 나혼자 非미대, 非디자인 전공자였다.)
지금 회사는 개발팀이 대표님의 연고지인 광주에, 나머지가 서울에서 근무하는 조금은 특이한 시스템이었다.
개발팀이라고 해봤자 5명이고, 나머지라 해봤자 대표님, 팀장님(기획/경영지원), 그리고 기획/디자인/기타을 담당하는 나였다.
세명이 근무하다 보니 사무실도 우리 것이 아닌 다른 회사 한칸을 빌려쓰는 식이었다.
사실 이런건 별로 상관없었다.
예전부터 초기 스타트업에서 일해보는 것이 막연한 꿈이었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허구한 날 뉴스에서는 취업시장이 좁다고 떠들어대는데 불쑥 뽑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출근 전 주말에 잠을 너무 많이자서 막상 출근 전날에 잠을 못잤다.
그렇게 피곤한 몸으로 겨우 일어나 씻고 출근을 했다.
회사는 대중교통으로 40-50분 정도 되는 거리로 오가는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회사에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건물 아래에서 단백질바를 먹고 팀장님께 전화를 드리려 했는데 대표님과 마주쳐 같이 출근을 했다.
출근 직후에 대표님과 짧은 면담이 있었다.
대표님은 나에게 한가지 당부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당연히 지각하지 마라, 실수하면 바로 말해라 등 기본적인 것들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정말 의외의 말씀을 해주셔서 감명 깊었다.
'자기 사업 한다고 생각해라'
라고 대표님이 말씀하셨다. 얼핏 듣기에는 간단해보여도 정말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초기 스타트업인 만큼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내포하는 의미를 지닌 말이었고 낭만과 급여 사이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괜히 연봉 협상 때 더 지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하루는 개발팀과의 데일리 스크럼으로 시작한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개발자분들의 자기소개를 들었다.
실제로 얼굴을 보고 일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개발자분들의 업무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을 가까이서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진 스크럼은 생각보다 무서웠다.
그 인자하신 대표님의 표정이 싹 바뀌고 문제사항에 대해서 지적하고 책임을 물으시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사업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회의가 끝나면 다시 내가 알던 인자한 모습으로 변하셨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긴장까지 해서 내색은 안했지만 정말 힘들었다.
회사는 다음주에 있을 박람회 준비로 매우 바빴다.
인수인계는 팀장님이 해주셨다. 문서로 간단하게 인수인계를 받았고 팀장님이 바쁘셔서 오전에는 한시간 정도는 잔일을 하면서 대기했다.
그리고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첫 임무는 박람회에 쓰이는 족자봉을 디자인 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이미 관련된 자료가 있었고, 거기서 중요한 정보를 뽑아내서 정리하는 식이었다.
족자봉 디자인은 처음이었지만 족자봉의 비율이 스마트폰과 유사해서 앱 온보딩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하지만 아직 회사의 서비스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무엇이 중요한 정보인지 몰랐기 때문에 팀장님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폰트 사이즈가 어느정도 되어야 멀리서 봐도 읽을 수 있는지 몰라 팀장님이 업체에 연락하시고 나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며 적지 않은 시간을 썼다.
결국 퇴근 전까지 90% 정도 완료할 수 있었다.
오후 6시 정도에 팀장님이 퇴근하자고 하셨는데 나는 지금 하고있는 작업을 최대한 끝내고 싶어서 30분 정도 더 작업했다.
결국 6시 반이 되어서야 팀장님이 다시 퇴근하자고 하셔서 다함께 나왔다.
아무리 바빠도 퇴근시간을 지키는 회사구나 싶어 안도했다.
사실 야근은 상관없지만 오늘 너무 못자서 하루 정도는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취직 소식을 전했을 때 부터 주변 혹은 인터넷에서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하는 우려가 꽤 있었다.
사수 없는 디자이너
사람 몇 없는 초기 스타트업
등등...
당연히 처음부터 대기업가면 좋고 거기서 오래있으면 좋은거 나도 안다.
하지만 못가는걸 어떡하나 내 실력이 부족한 탓이지
지금 모든 경험이 언젠가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멀쩡한 전공을 버리고 디자인을 선택한 것, 인생 첫 면접인 대기업 면접에서 탈락한 것, 그리고 어쩌다보니 초기 스타트업에서 사수 없이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 모두 다 언젠가는 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