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이 나락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당할까?

삭제하고 싶지만 마주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by merryblack

안희정이 나락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당할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나의 정체성, 나의 곳이라 믿고 있었던 공간에 안주한 채 잘 살다가도, 버릇처럼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그럼 그 질문은 '충분하지 않아'라는 답변으로 귀결되고 내가 이곳에서 쫓겨날 수도 있겠다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아, 세상사 영원히 안전한 공간이란 없구나.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맞춰가고 배워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를 때쯤 조금 괴롭기도, 외롭기도, 무섭기도 하다.

그런 질문이나 불안이 찾아오는 건 사회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그 사이에 서서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까? 내게 그런 자격이 있나?'라고 묻는 간극에서 시작된다.


2018년,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을 때, 우리는 그날 저녁 즉시 서부지방법원 앞에 모였다. 100명이 넘는 여성이 안희정과 재판관의 사진에 낙서를 하며 판결을 비판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한 활동가는 "오늘 정말 무기력할 뻔했는데, 이런 분노의 자리를 만들어주어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우리를 지탱하는 유일한 힘은 분노였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26년. 안희정은 대법원에서 확정된 3년 6개월의 실형을 살고 '자연인'이 되었고, 지난 2월 7일 박정현 부여군수의 출판기념회 현장에 초청받은 그는 맨 앞자리에 앉아 많은 이들의 환호를 받았다. 예전 대권 주자로서 가졌던 그 위력을 다시 위시하고 싶었던 걸까. 그들만의 축제가 다시 시도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와 다름없이 발 빠르게 반대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실무자로서 당면한 기자회견의 취지를 충분히 고민할 여유도 없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기자회견 현장엔 여전히 분노하고 있는 많은 여성들이 함께했고, 책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있는 여성들이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 간판과 함께 찍힌 사진은 아무리 봐도 명장면이었다.


기자회견 후 이어진 평가회의에서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이미 징역형을 살고 나온 사람에게 다시 정치를 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이야기 나누었느냐”고. 우리는 미투 운동을 통해 ‘성폭력 범죄자는 더 이상 공직자가 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었다고 외쳐왔지만, 그보다 앞서 ‘형을 마쳤다면 피선거권이 회복된다’는 법적 합의가 선행하고 있었다. 다수의 대중적 반응 또한 법적 책임 이후의 비난이 지당한 것인지 묻고 있었다.


나도 여전히 안희정이 꼴보기 싫다. 하지만 그 분노의 끝이 혹여 '존재의 삭제'로 가닿아야 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윤석열에 대한 '무기징역' 선고가 났을 때 '왜 사형이 선고되지 않았나?'라는 분노, "무기징역을 환영한다"라고 말한 사람에 대한 화살을 바라보며 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너무 많은 이들이 나락으로, 죽음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나의 섬세하지 못한 어떤 것이 단단한 무엇이 되어 실제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겠다. 물론 '위력'의 대가인 안희정이 더 이상 정치인으로 살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주검으로 돌아오더라도, 그것은 그가 권력의 맛을 잊지 못해서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이들이 단순히 그런 마음으로 떠나간 건 아니니까. 과연 우리는 어떤 근거로 그에게 정치적 행보를 멈추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정치인 안희정이 나락 가길 바라는 마음은 정당할까?




피식대학의 '나락 퀴즈쇼'를 처음 봤을 때 웃음이 나지 않았다. 비소에 대한 비소가 아닌가. '나락행에 대한 비꼼'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희석시키려고 하고 있었을까. '빅뱅 대성'을 등장시킨 순간부터 깊숙한 고민보다는 희석 혹은 납작한 회생에 조금 더 중점되어 있구나 깨닫고, 내가 가진 이 비소를 또 공감해 줄 이가 없을까 생각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떠나보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가해자들에게 '죽지 말라'고 응원해야 했다. 그 뒤에 '그래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빈약하다는 생각까지 들면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사건을 모른 척해야 했다.


나락행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나도 잘 안다. 나도 가끔은 보고 싶지 않고 이해조차 하고 싶지 않은 대상들을 타노스처럼 이 세상에서 삭제하고 싶다. 윤석열이나 트럼프가 당선되었을 때, 탄핵 반대 집회를 볼 때 특히 심각했다. 서울 도심을 걸으며 '이 세상에 나와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구나. 이 많은 사람들과 분리되고 싶다'는 너무나 강한 열망을 느꼈다. 종종 나의 SNS 계정에 윤석열 지지자의 악플이 달릴 때도 있는데 그때는 그 감정이 폭발한다. '내 계정까지 찾아오다니 부지런하네. 하지만 너 차단'을 외치며 그를 쉽게 차단했다. 그렇지만 내 안에 평화가 옴과 동시에 찝찝함도 남았다.


나락행. 아마 주목이 곧 성공인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그가 성공할 만한 대상인지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경쟁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제공자 혹은 소비자일 뿐이니까. 소비자로서 권력을 위시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목을 받은 그의 비도덕성을 소비재로 삼고, 혹여 그가 실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변명할 기회는 주지 않은 채 나락으로 보낸다.


물론 대중문화에서의 나락 현상과 정치적 퇴출을 요구하는 것에는 간극이 있지만, 나락행을 주도하는 이들을 그저 비판하기에는 나락행 문화의 주요 작동 근거 또한 도덕심이라는 점에서 나와 동질성이 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는 조금 더 엄격하게 'PC함(정치적 올바름)'이 그 기준이 된다. 그건 페미니스트의 생성 조건과 긴밀하다.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의 현장에서 여성들은 늘 '정'과 '관계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름의 올가미에 묶여 범죄로부터 탈출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죄책감을 자극하는 자살 협박에 시달렸고, 끝내 이별을 통보했을 때 살해당했다. 그러므로 여성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사랑’보다 ‘옳음’을 먼저 외쳐야만 했다. 관계 내에서 '친절할 것'과 '양해해 줄 것'을 요구받아왔고, 그것을 거부하고 옳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자의와 관계없이 페미니스트가 된다. 즉, 어떤 관계에서든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페미니스트의 생성 조건이었던 셈이다.


나 또한 한때 도덕과 정의, 분노라는 칼로 무언가들을 잘라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잘려나간 파편들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로 변형되어 온 것은 아닐까? 혹은 그 칼이 신자유주의를 충분히 비판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와 결탁해버려 누군가를 다시 구조적 소외로 몰아넣거나 두려움의 모습으로 돌아온 건 아닐까. 나는 그것이 내 탓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비도덕한 이를 나락행으로 보내는 것, 그 결과값에 대해선 과연 누가 책임지고 있나? 과연 오늘의 안희정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나의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악이 묻은 사람은 치워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영원히 삭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나는 꽤 보수적이고 우유부단하며 공부가 부족하고 공감도 적어 실수를 연발하곤 한다. 그때마다 내 마음속에 크게 자리하는 것은 이 진영에서 언제든 퇴출당할 수 있다는 공포다. 이렇게 위축되고 작아질 때면, 혹여 내가 퇴출되더라도 내 곁에 남아줄 소수의 사람과만 폐쇄적으로 관계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떠올려보면 내게 페미니즘은 연결의 방식이지 종착지가 아니었다. 페미니즘 끝에 내게 연결된 것은 ‘친구들’이었다. 내가 활동을 지속해 나갈 이유조차 '친구'다. 나에게 관계는 페미니스트이기 이전에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 없이 오직 '도덕성'을 기준으로 나락행을 종용하는 사회는 내게 큰 불안을 예고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퍼포먼스용으로 쓰였던 책 《김지은입니다》를 집으로 들고 와 비로소 펼쳐 들었다. 내 탓을 찾는 질문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고, 8년 전 분노의 원인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금의 어려움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을 넘길 때 나는 8년 전처럼 분노의 눈물을 흘렸다. ‘비서’라는 직업적 환경에 대한 이해도, ‘위력’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인식도 턱없이 부족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전에 보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책을 통해 마주한 진실은 개인의 도덕성 그 너머, '구조'에 있었다. 도지사 안희정은 자신의 손발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이 직접 수발이 되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도록 자아를 확장해 왔고, 민주당을 비롯한 정치권의 구조는 인간이 인간 이하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그 비대해진 자아를 보조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어떠한 거절도 할 수 없었던 환경이 그를 괴물로 만들었고,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다. 성폭력이 가능했던 조건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8년 전이나 지금이나 외치고자 하는 바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기자회견에서 놓친 것이었다.


나락행 문화는 이 지점에서 문제와 매우 교묘하게 연결된다. 나락행 문화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 구조적 문제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결함에 훨씬 열광적으로 몰입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경제 논리에 따라 그가 더 이상 소비되지 않을 뿐'이라고 포장할 수 있겠지만, 그 본질에는 "모든 성공과 실패는 본인의 책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자기책임론이 깔려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상에서 짓눌린 개인들은 복잡한 시스템의 결함을 은폐하고 오직 한 개인을 심판대에 세운다.


일본 정신과 전문의 구마시로 도루는 좁은 도시에 갇힌 사람들이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무해한 존재가 되라는 압력"을 받다 못해 질식해버린다고 말한다. 서로 쾌적하고 효율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인간은 개조된다. 구마시로 도루는 이를 ‘사회적 표백’이라 불렀다. "에밀 뒤르켐이 ‘질서가 완벽히 유지된 수도원에서는 작은 일탈도 큰 죄악으로 간주한다’고 말했듯, 예전 같으면 웃고 넘길 실수나 소음이 이제는 용서받지 못할 ‘민폐’가 되고, 척결해야 할 ‘악’으로 규정되며 사회가 쾌적해질수록 ‘죄인’의 범위도 더 넓어진다"고 말했다. 내가 서울 도심을 걸으며 나와 다른 사상을 지닌 사람들과 분리되고 싶음을 느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시금 정희진이 '극우의 반대는 공존이다'라고 말한 것이 진리였음을 깨닫는다. 보다 도덕적으로 결백한 이들만이 숨 쉴 수 있는 표백된 세상은 실상 구조 아래에 있는 이들의 자유를 박탈할 뿐이며, 구조 위에 있는 자들을 결코 바꾸지 못한다.


물론 개인의 잘못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메시지를 던지며 많은 이에게 판단을 요구하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관찰자에게도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이 발생한다. 그를 삭제함으로써 얻는 효능감은 달다. 그러나 구조를 바꾸지 못한 무력감을 달래기 위한 '가짜 인과응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의 잘못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떤 사회적 책임을 마주해야 하는가? 안희정을 더 이상 꼴 보기 싫은 나는 경제적·정치적 논리에 따라 그가 영영 회생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나락을 기도해야 할까?




피해자를 마주 볼 용기, 구조를 마주 볼 용기


무엇이든 그 안을 들여다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기자회견은 다소 거칠었지만 만약 내가 '합의를 거쳐야 한다'며 기자회견을 미뤘다면, 나보다 먼저 그 안을 들여다본 여성들의 발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발언자 가현은 말했다. 안희정은 재판 내내 혐의를 부인하며 조직적인 2차 가해를 가했고, 끝내 피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도울 책임이 남아 있으며, 최소한 사과할 용기조차 없는 이를 정치인으로 바라보지 않을 사회적 합의가 우리에겐 필요하다고. 가현의 말처럼 그가 피해자 앞에 설 용기, 사과할 용기를 내는 것이야말로 그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 유일한 조건이다.


나는 마찬가지로 그 용기가 그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가해자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를 가능하게 했던 구조를 들여다볼 용기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바꿔 말하고 싶다. 김지은이 고발한 것은 '안희정 개인의 성폭력'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가능하게 했던, 누군가를 인간 이상으로 만들고 누군가를 인간 이하로 내몰았던, 조직적으로 구조화된 '이상한 세계'였다. 나 또한 여전히 국회를 오가며, 누구든 들어가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 세계의 일그러짐이 여전함을 느끼고 있다. 단순히 한 명의 지도자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든 어디서든 일상의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메시지, 한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옳음을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고 구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말이야말로 내가 정말 외치고 싶었던 내용인지도 모른다.



안희정의 정치권 복귀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요구 앞에서 나는 다시 주저한다. 이것은 단지 그가 보기 싫어서일까,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본 적이 없어 생긴 불신 때문일까, 아니면 죽어간 수많은 가해자의 멱살이든 목숨줄이든 뭐라도 잡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그가 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동시에 가해자가 사라짐으로써 구조의 책임을 면피하는 세상이 아니라, 왜 가해가 발생했는지 그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숙의할 시간을 가지자고 외칠 용기 낼 나를 원한다. 사건만이 아니라 사건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며 끝내 가해자가 자신의 과오를 사과하는지 지켜보자고, 살아남아 회복하는 피해자를 끝까지 지지하자고, 개인이 아니라 구조를 끝까지 변화시켜 보자고 말할 나의 용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가 정치권에서 퇴출되어야 한다'고 외쳐야 함을, 누군가는 단행해야 함을 안다. 그가 죽지 않길 원하지만 "발도 들여놓지 마!"라는 말을 외쳐야 함을 안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니까. 그 또한 표백된 세상에서 민폐를 끼침으로써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임을 아니까.


이 글은 누군가를 나락으로 보내는 것보다 구조에 질문하고 그의 세계를 마주할 용기가 나에게도 아직은 어렵기 때문에 쓰인 글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복잡하고 복잡한 세상에서 오늘도 복잡하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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