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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리뷰

나의 세계를 알아버린 당신은 이제 나에게 어떤 세계가 되어줄 수 있는가?

by merryblack

*이 글은 내용을 스포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자의 세계에는 주인이 있다.


우리는 그 세계의 주인이 어떤 말에 아파하고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온전히 알 수 없다. 사과를 싫어하는 건 알아도 사과에 알러지가 있는지, 혹은 사과의 모양이 마음에 안들었는지, 아님 사과라는 단어 자체에 알레르기가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당신을 온전히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하다. 당신과 함께 웃을 수는 있어도, 당신과 함께 울기 어렵다.

당신을 온전히 알지 못할 땐, 어떤 맥락에서 괜찮은 말들은 어떤 맥락에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내가 당신에게 언제 상처를 주었는지 모르는 채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면 우리가 쌓아온 시간들이 통째로 부정되는 듯한 당혹감을 느낀다.


"너의 첫 경험은 어떠했는지" 묻는 친구의 질문에 주인은 끝내 답할 수 없다.

"친구의 작품이 어떻게 되든 말든 넌 상관없지"라며 서운함을 내비치는 것은 친구사이에서 내던질 수 있는 괜찮은 말이지만, 그 말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깨닫는 순간, 친구는 스스로의 말이 부끄러워 주인을 바라볼 수 없다.


조심하려 애써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곧장 실수가 되곤 한다. 우리는 '몰랐을 뿐'이라는 알리바이를 대면서도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주인이 서운하고 밉기까지 하다. 내심 '알려줬더라면 내가 그런 말은 안 했을 텐데' 생각하지만, 알고 나서도 종종 더 잔인한 실수를 하기도 한다.




"몰랐을 때 더 편했던 것 같아."


이 말은 종종 타당하다. 피해자 역시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테니까.


그러나 몰랐으니까 실수에 대해 양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가능성들에 기댄 아주 빈약한 기대이다.

이 기대는 피해자가 고통을 끝까지 숨긴 채 이 안전한 세상을 계속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는 선의에 기대며,

주인이 나를 사랑하고 용서해줄 것이라는 가능성에 기대고,

주인이 아직 이 세상에 함께 하고싶다는 마음을 가졌을 가능성과 주인의 마음이 아직 닳을 구석이 남아있을 가능성에 기댄다.


그러니 그 모든 기대를 배제한 채 안전한 그의 세계에 불청객으로 발을 들였다가 주인의 분노를 온전히 받게 되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모름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모름' 속에 숨어있던 우리의 책임이다.




폭로, 이제 문제는 아는 자의 것


세계의 주인은 결국 이 세계를 폭로한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이 위태로운 세상이 사실은 얼마나 더 위태로운지 폭로한다.


주인은 폭력의 언어 대신 몸짓으로 통증을 전달한다. 주인은 고통을 괜찮은 척 참아내려는 누리의 살을 꼬집으며 "이래도 안 아파?"라고 화를 돌리고, 누리를 향해 분풀이를 한다. 고통의 언어화에 실패한 주인이 스스로의 통증을 타인에게 전가하며 확인하려는 애처로운 방식이다. 이 진실을 CCTV로 찾아낸 엄마가 스스로도 자신의 고통을 토해내고 주인의 손등을 꼬집는 행위는, 비로소 고통을 공감하기 위해 “아프냐고" 묻는 뒤늦은 시도이다.


수많은 가능성을 배제했던 안전한 세상은 깨져버린다. 기존의 세상이 얼마나 취약했는가와 상관없이,

이제는 그 취약함을 알아버린 것이 문제가 된다.




나의 세계를 알아버린 당신은 이제 나에게 어떤 세계가 되어줄 수 있는가?


이제 진실을 폭로한 주인은 세계를 향해 묻는다.


가해자 만큼이나 내 편이 충분히 되어주지 못했던 나의 세계는 또다른 폭력이었으며, 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세계는 나를 세계로부터 추방시킨다.

영화 속 주인에게 몰래 전해진 '쪽지'들에는 끊임없이 진실을 추궁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하는 글들이 적혀있었다. 이는 마치 주인 스스로가 자신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되어 세계의 주인을 끊임없는 자기 의심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게 만든다.


이때 주인은 수호에게 "만약 네가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는 누리가 성폭력 피해를 당한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묻는다. 이는 단순히 분노에 찬 협박이 아니라, 나의 세계를 상상해달라는 요청, 즉 윤리적 초대장이다.

만약 너가 사랑하는 이에게도 그 세계가 펼쳐진다면 너는 보다 친절한 세계가 되어줄 수 있냐고 묻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온전히 타인의 세계를 다 알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폭력적이며,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할 시점을 놓쳐버렸더라도, 그래서 묵묵하게 휴지를 건네거나 물을 건네는 것밖에 할 수 없어도, 우리는 이미 그의 세계이다.

성폭력 피해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낱낱이 아니라 '회복가능성'이다.

곧, 이후에 어떤 세계가 가능한지에 대한 상상이다.




다른 세계를 상상하며 : 판타지와 리얼리즘, 어느 사이의 결말


영화는 주인에게 끊임없이 의심의 말을 건네던 쪽지의 주인공이 “사실 나도 같은 일을 겪었어.“ 주인에게 잘 들려지지 않던 고통의 말들을 폭로해준 것에 "고맙다"는 마지막 쪽지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매번 주인을 주저앉게 하던 쪽지의 화자가 주인으로 인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심과 고백, 자책과 고통이 교차되는 세상이 어디에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교차를 넘어 우리는 주인이 다시 그의 세계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해 들으며, 주인은 다시 세계의 주인으로서 세계에 초대된다.


자신의 세계를 폭로한 사람으로 인해, 또 다른 취약한 이도 그 세상을 다시 살아 낼 수 있다.

마지막 쪽지의 발화자로서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교차되어 들려졌듯이, 성폭력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 누구나, 여러 번 쫓아내지더라도 기어코 다시 자신의 세계로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우리는 그 세계가 되어줄 수 있는가.

세계의 주인은 가해자들만의 것이어도 안 되고 피해자들만의 것일 수도 없다. 세계는 나눠 가질 수도, 온전히 열릴 수도 없다. 여기에서 진실은 무의미하다. 오직 취약한 우리들에 대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언젠가 우리는 타인의 세계에 초대되고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것만이, 이 영화가 던지는 유일한 진실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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