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이유
J
처음 겪은 밴쿠버의 겨울은 밤이 길고 비가 많이 왔다. 매일 컴컴하고 축축한 저녁을 혼자 보내는 것은 매우 우울한 일이었다. 그리고 평생 안 올 것 같은 밴쿠버에 여름이 왔다. 별로 덥지도 않고 해가 늦게 진다. 최근 일을 마친 후 차를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해변을 갔다. 해수욕장 옆에 붙어 있는 조용하고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바닷소리를 듣고 있자니 네가 좋아하는 풍경일 것이 분명해 네가 그리워지더라. 이제는 혼자 보내는 저녁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이 곳의 겨울도 그렇게 춥지 않게 느껴질 것 같다. 하루 일상을 마친 뒤 함께 늦게까지 여는 카페를 찾아다니고 여름의 바다와 숲을 보러 다니고, 가끔은 캠핑을 가는 상상을 한다. 그 날을 빨리 맞이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다.
S
몇 시간 전 네가 밴쿠버로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 널 배웅하고 돌아오는 내내 얼마나 속상하고 가슴이 아팠는지 떠올랐다. 슬펐다. 첫 번째 이별도 아닌데 이렇게 슬프다. 네가 보고 싶다.
가끔 내가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우려이다. 하지만, 네가 그리운 것은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진짜의 감정이다.
그렇기에 그냥 결혼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