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는 뭉친 고기는 안 먹어'
나는 오랫동안 이 문장을 잊지를 못했다.
엄청난 사연이 있는 문장이면 좋겠지만 그런 건 아니다.
강릉에서 국물이 빨간 순두부찌개를 먹다가 들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 말은 서영인지 영서인지 잘 기억 안난다.
고등학교 친구가 한 말이다.
'뭐 더 시킬까? 떡갈비?'같은 질문에 답한 것이겠지
이 말이 인상 뜬금없게 인상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어딘가 그 말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대개 싫어하는 야채 같은 것에
호불호가 있는 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호불호 없이 좋아하는 고기에!
그런 세세한 취향이 있다니 왠지 멋있어 보였다.
심지어 나는 떡갈비는 좀..이 아니라
'뭉친 고기'라고 표현했다.
고기라고 하면 별생각 없이 맛있게 먹곤 했던 나 자신이
어딘지 좀 촌스럽게 느껴졌다.
이 문장은 마치 도장처럼 내 머리에 선명하게 찍혔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위해 서울에 올라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긴커녕 학생이란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에게 이 문장은 하나의 의무로 자리 잡았다.
세세한 취향, 음미를 할 만큼의 여유와 섬세함
언제나 기회가 된다면 그런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 의식해서 옷이든 음식이든 책이든
온갖 영역에서 나름의 취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점점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채워 나갈
취향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작가는 좀 내 취향이 아니더라'
'와인은 드라이한 것이 좀 더 내 취향이더라'
'향수는 우드계열이 내 취향에 맞는 것 같더라'
'클래식은 라흐마니노프 노래가 내 취향에 가까워 바흐는 좀 단조로워서'
섬세한 취향은 나라는 존재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 행위 자체만으로 중독적이기도 했다.
'나'로 시작하는 문장이 주는 중독성이란..
취향은 그런 것이다.
취향이 생기면 나는 더 선명해진다.
그리고 그만큼 바깥과 경계가 그어지고 구별이 되었다.
그리고 '뭉친 고기' 이팩트는
나에게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 듯했다.
무색무취로 살아야 하는 기간이 길었던 사회인만큼
취향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했다.
한 사회의 유행이자 마땅한 의무이자 누릴 수 있는
사치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적극권장하는 일이었다.
'취향이 맞는 사람과 사귀고 싶어요',
'영화 취향이나 독서 취향이 안 맞으면 힘들어요'
'저는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즉 취향이 뭔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들이 계속해서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내뱉어져 나왔다.
이렇게 주변세상을 게걸스럽게 나의 취향이라는
갈고리로 끌어모으며 내 주변을 꾸며나갔다.
<Interior of a Collector’s Gallery of Paintings and Objets d’Art>
작가 : Cornelis de Baellieur (1637년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