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리고, 커피숍 안에는 캐럴이 울려 퍼지는 연말이다. 서른다섯을 며칠 앞둔, 내 생애 최고로 젊은 오늘 스스로도 부정하며 피해왔던 사실을 인정하려 한다.
꼰대가 나타났다, 내 안에.
그간 꼰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와 내 동료들이 상사를 일컫는 용어였다. "나 때는 말이야~", "요즘 애들은 말이야~"로 말문을 여는 상사의 연설이 시작될 때마다 자연스레 내 두 귀는 셔터를 내리고 상사의 머리 위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꼰.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단어였다. 1980년대 중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로 태어난 나는 디지털에 친숙한 새로운 인류, 밀레니얼 세대였다. 기성세대가 정해 놓은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자기계발과 자기 주도적인 삶에 공을 들이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그 세대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는 부모님을 곁에서 바라만 봤을 뿐, 보릿고개를 겪거나 나라의 경제적 위상이 저조해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저성장 기조에서 살아가는 같은 세대에게 일종의 연민의 마음과 동지애를 갖고 있었다. 열심히 일해도 내 집 한 칸 마련하기 힘든 현실과 아무리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취업시장, 연애를 하고 시간을 쓰는 데도 돈이 필요한 세상에서 같이 살아가는 친구들과 마음을 나눠왔다.
그런데 올 가을부터 이 공감 능력에 이상신호가 감지됐다. 당시 나의 일상에 가장 큰 변화가 이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바뀐 사회생활이 내 안에 잠들어 있는 꼰대 괴물을 서서히 흔들어 깨운 것으로 보인다. 올 가을 신기술을 다루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그간 미디어에서 기자로 활동해온 내가 이곳에서 맡은 일은 새로운 산업에 대한 기사를 다루는 업무였다. 해왔던 일이기에 업무에 대한 어려움은 없었지만, 유독 적응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고령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간 몸담았던 곳들과 스타트업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었다. 20대의 비중이 높았고, 오십여 명이 훌쩍 넘는 임직원 중에서 나는 C레벨 다음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다. 신기술을 다루는 업종이다 보니 외부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이렇게 많은 20대 친구들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그간 후배들과 격의 없이 지내왔기에 '친구 같이 털털한 선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20대들을 만나면서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생겼고, 이들에게 훈수를 두는 일이 잦아졌다. 회의를 하면서, 미팅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기자생활 시작했을 때는 말이야~", "요즘 친구들은 말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때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고 진땀을 흘렸다. 내 안의 꼰대가 스멀스멀 존재를 키워가고 있을 때는 "그 말은 대체 어떤 의미로 하신 건가요?"라는 카톡을 받았다.
'아차,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자.'
이후 나의 사회생활 가면은 '꼰대 아님'으로 바뀌었다. '친구 같이 털털한 선배'는 개나 줘버려. 무심코 튀어나오는 말 자르고, 머릿속에서 해야 할 말을 거르고. 일단은 그렇게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올해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지금 어느 정도 이 생활이 익숙해졌고, 사람들과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는 확실히 안정됐지만, 요즘 들어 가슴이 답답하거나 잠을 설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고민 끝에 브런치에서 '꼰밍아웃'을 하기로 했다. 내 속에 있던 말을 눈치 보지 않고 꺼내놓으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오프라인에서는 조선시대에 시집간 아녀자처럼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을 실천한다 해도, 브런치 대나무 숲에서는 속 시원히 내질러야겠다.
나처럼 '꼰대 아님' 가면을 쓰고 있는 이들이 적잖을 거라 생각한다. 몸을 조였던 코르셋을 벗어던지고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탈코르셋' 운동이 거센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 있겠나 싶다. 꼰대들, 꼰대 꿈나무들, 우리 '꼰밍아웃'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