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소동

영화 <만추>

by 장현석

글 장현석, 그림 이지호



누구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의외로 쉽게 꺼내는 날이 있다. 택시 뒷자리에서, 기차 옆자리에서 때론 낯선 이에게 내 속을 훤히 보인다. 서로에게 달린 무거움을 가늠하지 않고 애써 다가가지도 않기. 이는 암묵적인 대화의 규칙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한참 후 다시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서면 그만인 관계들로부터 진한 위로를 얻고 날 때의 기분이란.


이게 다 외로움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이 어떻다는 흔한 말은 기실 DNA에 이 마음이 박혀있다는 사실만 거듭 떠올리게 한다. 이중 얄궂은 몇은 종종 제멋대로 사람에 올라타 조종석을 차지한다. 눈 밖 풍경을 세피아톤으로 윤색하기도 하고, 귀에 드는 의미 없는 소리들로부터 교향곡을 만들며, 잠깐 손끝에 와 닿은 온기만으로 온몸을 덥힌다. 로맨스와 짓궂은 외로움은 닭과 달걀처럼 먼 옛날 어디로부턴가 엎치락뒤치락 앞뒤 없이 통째로 왔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이후 '감사합니다'라고 그녀가 말했으리라. 한밤중 택시 운전수에게, 우중충한 기차 옆좌석에 앉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친밀감으로 나를 견디고 귀기울여준 이에게 느끼는 대견함과 고마움, 꼭 그만큼이다. 두터운 시간의 켜는 그녀에게 거짓말 같던 이삼일의 기억이 외로움이 벌인 한바탕 소동이었음을 친절히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카페에 앉은 그녀는 지금도 조종석을 놓고 열띤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겠지만.


<晩秋, 이지호 作,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