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미워하던 남자

영화 <바이스>

by 장현석



바야흐로 '엽기'의 시대였습니다.


2001년에서 2002년 정도로 기억합니다. 당시 제 책상 앞 모니터에는 인터넷 세상이 천지개벽하듯 열렸습니다. 웹사이트에는 유머라는 젠틀한 이름 아래 초등학생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조롱과 비아냥의 블랙 코미디가 범람했습니다.

그 시절 엽기라는 단어 앞에 숱하게 따라붙던 영광의 주인공들이 떠오릅니다. 그중 안톤 오노, 조지 부시로 대변되는 미국은 유머 사이트의 흥행 보증수표였습니다. 짐작컨대 본격적으로 열린 인터넷 공론장에서 젊은 세대의 반미와 저항의 문화가 빠르게 퍼졌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제 귀에는 여전히 투박한 멜로디의 '퍼킹 유에스에이'가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마냥 '퍼킹'하기엔 미국은 너무 가까운 나라입니다.


사실 대한민국 현대사는 미국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오래전부터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린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덕분에 저도 다른 나라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미국 대통령 이름은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인상을 떠올리면 조지 W. 부시 대통령부터 시작됩니다. 워낙 어렸을 때라 직접 보고 들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는 모니카 르윈스키 빼곤 없는 것 같습니다(조만간 그를 힐러리 남편이라고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먼 기억 속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발 재채기를 떠올리면 거짓말 조금 보태, 대부분 부정적인 기억들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중동을 용서치 않겠다


영화 <바이스>는 그때 그 시절 미국 정계 인사이더의 이야기입니다.


그냥 인사이더도 아닌 '핵인싸'입니다. 악의 축을 응징하고자 중동을 조지고 부시던 당시, 초법적인 권력을 가졌던 미합중국 부통령 딕 체니가 그 주인공입니다. 딕 체니 부통령은 후대가 역사를 논할 때 빠짐없이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그렇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시고자 친히 막대한 권력을 손에 넣었던 분입니다. 영화의 제목 Vice는 딕 체니의 직함 Vice President(부통령)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시에 권력욕으로 미국을 쥐락펴락하던 한 정치인의 Vice(악덕)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영화는 자연인 딕 체니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정계에 입문하기 이전 구제불능의 나날을 보내던 딕 체니는 한석봉 어머니에 버금갈 정성과 지도편달을 보여준 아내 덕분에 가까스로 사람 구실을 하기에 이릅니다. 기실 딕 체니는 가문이든 재력이든 대단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잃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이 남자는 결핍을 원동력으로 누구보다 큰 야심을 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조력에 힘입어 야망은 정계를 향합니다. 인턴으로 미국 국회에 발디뎌 정장 재킷 옷매무새를 만지던 딕 체니는 어느덧 성취와 성장을 거듭하며 한 칸 한 칸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갑니다.


야망의 눈동자, 딕 & 린 체니


승승장구하는 정치인의 이면에 또 다른 딕 체니가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두 딸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는 가족에게 세심한 관심을 보이고 책임감을 지닌 멋진 아버지입니다. 동성애자인 딸을 위해 보수 공화당의 동성애 반대 선거 유세를 포기하는 딕 체니는 어느 순간 관객에게 사려 깊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다가갑니다.

또한 그는 오랜 시간 열심히 병마와 싸웁니다. 급작스럽게 쓰러지는 순간 자신의 증상을 말하고 구급차까지 요청하는 그의 모습은 자수성가형 캐릭터와 오버랩됩니다. 남몰래 가쁜 숨을 내몰아쉬는 딕 체니에게서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의 숭고함마저 보입니다.


하지만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의 끝은 정치인 딕 체니입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질병의 고통과 싸우는 그이지만 영화가 비틀고 비틀어 결국 그려내고자 하는 딕 체니의 모습은 단 한 가지, 막후 정치인입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가정생활과 병마와 싸우는 모습은 악당 출현 서사로 편입됩니다. 지독하게 권력을 탐하는 정치인의 말년에는 젊은 날 보여주던 인간적인 면모가 얼마 남아있지 않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부통령 제안을 수락한 이후 그의 삶에서 가족과 자수성가의 감동은 묘연해집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막강한 백악관 안주인이 된 시점 뒤로, 가족도 열정도 조금씩 균열을 일으킵니다. 덕분에 영화 후반부는 악당 딕 체니를 남겨두고 그가 어떻게 미국 정계를 쥐락펴락했는지 설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싸가 된다


빈정거림도 이 정도면 예술이 될 수 있겠습니다.


딕 체니의 업적과 미국 정치 사회에 대한 고급스러운 조롱은 영화 <바이스>의 탁월한 성취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라님들 골탕 먹이는 게 민중의 재미라지만 그 '퀄리티'는 천차만별입니다.

영화는 관료들을 무식한 멍청이 혹은 악한으로 묘사하지 않고, 진지하게 이들의 모순된 상황으로 관객을 데려갑니다.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고르듯 국가 중대 법안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들의 대화는 그 분위기만큼 고급스러운 조롱의 품격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는 정치 서사 덕에 비아냥의 뇌관과 이에 따른 웃음 폭탄은 러닝 타임 곳곳에서 알맞게 터집니다.


영화 <바이스>는 가벼운 이야기입니다.


앞서 영화 <빅쇼트>를 연출하며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금융위기를 풀어냈듯, 아담 맥케이 감독은 영화 <바이스>에서 그때 그 시절 미국 정계의 뒷모습을 술자리 대화처럼 익살스럽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분명 딕 체니와 조지 부시 시절의 이야기인 만큼 많은 이들이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두 영화의 방향과 결은 명백히 다른 곳을 향합니다. 마이클 무어의 미국 사회 해부가 역사 바로잡기 혹은 음모론에 가까웠다면, 아담 맥케이의 부시 정권 이야기는 일종의 '뒷담화' 혹은 '썰 풀기'에 가깝습니다. 충분한 이야깃거리 원재료에 농익은 조롱이라는 양념을 더해 만든 블랙 코미디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딕 체니인지 크리스천 베일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 영화라지만 한국 사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화 <바이스>는 실존 인물을 다루지만 다큐멘터리보다 극영화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시대와 캐릭터에 다층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언제든 미국 사회를 환기시킬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고급스러운 풍자와 해학은 물론 이를 가능케하는 마중물이겠지요.

국내에서 같은 역할을 수행할만한 유사한 톤의 정치 사회 관련 영화를 떠올려보면, 마땅치 않습니다. 유신 정권 마지막을 담은 영화 <그때 그 시절> 정도가 있을까요. 한국에서 이러한 류의 영화는 제법 양극화되어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공동정범>과 <자백>처럼 침잠하듯 묵직한 메시지와 울림을 주거나, 실화를 그대로 말하지 못하고 에둘러서 표현하는 수많은 극영화들로 나뉩니다.


영화 말미에 딕 체니인지 크리스천 베일인지 모를 남자가 쏘는 질문은 분명 오늘, 공화당, 트럼프 시대 미국 사회를 환기하는 작은 공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관을 나올 때쯤 관객들이 웃음기 뒤로 남은 씁쓸함을 곱씹어보리라 확신합니다. 영화 <바이스> 만큼이나 이를 관람하고 공유하는 사회가 부러운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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