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러브리스>
대한극장에서 관람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그대로 들어가기 아쉬운 마음에 친구와 가까이서 맥주나 한 잔 하기로 했습니다. 을지로 골목은 쌀쌀한 봄 날씨에도 삼삼오오 모인 이들로 북적였습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패거리, 비슷한 옷을 입은 직장인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까지 웃고 즐기는 가운데 노가리를 찢고 맥주잔을 비웠습니다.
눈이 시릴 만큼 차가운 영화 <러브리스>에 대한 인상을 나누다 무심히 둘러본 을지로 골목엔 제법 온기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영화가 그린 비정한 세상보단 현실이 살만하지 않을까. 넉넉한 웃음소리를 뒤로 그렇게 믿고 싶은 한때였습니다.
부부가 이혼을 결심합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아내와 남편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가 아닌 무관심이라지만, 상대에게 무심한 이들은 오래간만에 말이라도 섞으려면 가장 날 선 혐오를 뱉어댑니다. 슬프게도 부부에게는 어린 아들 알로샤가 있습니다. 시가전에 휩쓸린 마을 주민처럼 아이는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포탄이 날아다니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입니다. 새 인생을 살겠다며 각자의 애인들과 부지런히 시공간을 함께하는 엄마와 아빠는 어린아이를 혼자 둡니다.
어느 날 알로샤가 사라집니다. 민간단체의 도움을 받아 부부는 허겁지겁 아이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나섭니다. 공동의 위기를 계기로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다시 한 마음으로 뭉치긴커녕, 부부의 서로에 대한 원한과 적대감은 커져갑니다. 정작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아들로 추정되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됩니다. 훼손된 시신을 확인하기보단 무턱대고 아닐 거라 부정하며 부부는 끝내 아이 찾기를 포기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두 커플은 새로운 파트너와 가정을 꾸립니다. 이들의 일상에서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두 커플은 익숙하게 또 한 번 사랑을 잃어갑니다. 여전히 황량한 들판엔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낡은 포스터가 붙어있습니다.
겨울의 적막을 닮은 영화 <러브리스>는 러시아의 오늘에 대한 은유를 드러내며 가본 적 없는 나라를 실컷 상상하게 만듭니다. 사원 개개인의 가정에 간섭하는 회사라든가, 아이를 찾아달랬더니 뻔뻔하게 거절하는 경찰 공무원 등은 무책임한 국가주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읽힙니다. 게다가 영화 말미에 TV를 통해 방송되는 우크라이나 내전 소식은 어지러운 당대 러시아를 노골적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러브리스>는 '마더 러시아'를 향한 감독의 일갈로 끝나는 영화가 아닙니다. 아이가 없어진 가정을 두고 사랑이 사라졌다고 제목 붙인 영화는 범국가적 보편성을 지닙니다. 영화는 오늘, 여기에 접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은유와 묘사가 이입하기 어렵지 않게 이어집니다.
하나. 가정 파탄과 대물림의 굴레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역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행복에 조건이 있다면 이들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때에만 가족 구성원은 화목할 수 있습니다. 파편화된 채 권태와 혐오만 남은 알로샤 가족에는 누구도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아내도, 남편도, 아이도 각자 오래된 불행 앞에 서있습니다.
가정 파탄을 말하기 위해선 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알로샤의 엄마는 사라진 아들을 찾기 위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멀리 사는 친정엄마를 찾아갑니다. 까마득히 오랫동안 마주한 적 없는 둘은 기다렸다는 듯 비난과 폭언을 주고받습니다. 손자에 대한 걱정보다 딸에 대한 불만으로 '널 낳지 말았어야 했다'는 친정엄마의 발언은 며칠 전 알로샤의 엄마가 아들을 두고 했던 말과 꼭 닮았습니다. 알로샤의 엄마가 보여준 사랑의 실패는 오래전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스스로의 경험에서 기인합니다. 사랑의 무서움은 대개 경험 이상의 의지를 갖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할 줄 모르는 이들의 사회병리적 증후는 러시아만의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둘. 보이는 삶, 공허한 사랑
영화 <러브리스>에는 사진과 거울이 빈번히 등장합니다. 사진은 실체를 모사한 이미지이며 거울은 실체의 반영입니다. 두 소재는 스스로의 가치보단 타인의 욕망을 따르며 피상에 메어있는 인물들을 넌지시 은유하고 있습니다.
드러나는 이미지에 집착하고 자신을 전시하길 권유받는 시대입니다. 본질에 다가가려는 개개인의 사유는 관심사에서 밀려난 지 오래입니다. 피상의 범람 덕분에 달라졌을 사랑에 대한 태도가 알로샤의 부모를 통해 드러납니다. 영화 <러브리스>는 본심은 온데간데없이 껍데기끼리 주절거리고 격렬히 몸 섞는 흔한 '사랑'을 꼬집고 있습니다.
가정을 저버리고 시작하는 각자의 사랑에서 이들은 욕망을 부표처럼 달고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표류합니다. 서로에게 정박하길 포기한 이들은 또 다른 뭍을 찾고 언제든 달아날 수 있는 만남을 시작합니다. 진정성이란 본래 묘연하다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로샤의 엄마도 아빠도 각자의 사랑에 진정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로맨틱한 사랑의 말들도 공허함으로 가득 찬 이들의 입을 거치는 순간 부박하고 초라해지길 반복합니다.
셋. 반성의 부재
알로샤의 부모는 이혼 도장조차 찍기 전 각자 새 애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들은 연인의 품에서 속삭입니다. 당신 덕분에 난 비로소 사랑을 깨달았어, 너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는 달라. 여기에는 인생 새 회차에서 과거를 청산하고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가 담겨있습니다.
미안하지만 이들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기 성찰이 빠진, 본능에 충실하고 자극을 좇는 동물의 성애를 닮았습니다. 영화 <러브리스>는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곧 사랑이라는 시대의 흔한 착각을 긴 러닝타임을 들여 비틉니다. 알로샤 부모의 반성 없는 사랑은 한때 불타오르지만 결국 영화가 끝나갈수록 보란 듯이 차갑게 꺼집니다. 추측컨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비슷하게 둘은 사랑한다고 서로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성찰 없는 사랑에선 나아질 리 없는 비극이 반복됩니다.
차가운 성애의 묘사
영화 속 성애에 대한 담담한 묘사가 인상에 남습니다. 알로샤의 부모는 서로의 애인과 각자의 시공간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이들에 대한 영화의 태도는 정사 장면에서 오롯이 드러납니다. 카메라는 크게 움직이지 않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처럼 무심하게 움직임을 포착합니다. 애틋하고 파토스 넘치는 사랑과 다르게, 연인들은 온기가 없는 푸르스름한 침실에서 부지런히 몸을 섞습니다. 입으로 사랑을 속삭이지만 절제된 시선 덕에 이들은 아름답기는커녕 번식 활동하는 동물처럼 무미건조하게 표현됩니다. 진정성을 잃고 서로에 대한 단순한 욕망으로 부둥켜안은 연인들이야말로 사랑을 잃어버린 시대에 대한 적확한 은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전히 붙어있는 실종자 포스터
영화가 끝났지만 여전히 알로샤는 행방불명입니다. 그 누구도 아직 사랑을 찾지 못했습니다. 알로샤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는지, 혹은 정말 시체가 되어 돌아왔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가, 사랑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알로샤의 부모는 시신의 DNA를 확인하길 거부했습니다. 사라진 자식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있다면 확인하고 나름대로 마무리하는 게 순리겠지만, 이들 부모는 확인은커녕 여전히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믿기로 결심합니다. 어쩌면 그저 미루듯이 서서히 잊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사랑은 끝내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사랑을 지켜줘야 할 기억에게조차 조금씩 잊힙니다.
여전히 각자의 새 가정에서 알로샤의 부모는 시큰둥하게 핸드폰을 만지거나, 자식을 귀찮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잃어버린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지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태도가 바뀌는 일 따위는 영영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시대, 함께 사라져 버린 구원 가능성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서늘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