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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현석 Jun 30. 2023

#30 촉촉하다

재즈를 위한 형용사 사전

Bill Evans Trio 빌 에반스 트리오

<Waltz for Debby>


촉촉-하다 「형용사」 물기가 있어 조금 젖은 듯하다.



유리창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는 빗방울같이 몸이 까라지는 날이 있다. 지루한 장마엔 마음 한구석 올망졸망 아련함이 싹튼다. 하릴없이 비 오는 날 오후, 빌 에반스 트리오의 앨범 <Waltz for Debby>를 플레이어에 얹는다.


창밖엔 비 내리고 세 사람이 원탁에 앉아있다.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면 상냥한 둘은 귀를 쫑긋 세운다. 조곤조곤 말할 땐 부지런히 고개 끄덕이며 맞장구 쳐준다. 이내 할 말이 끝나면 옆 사람이 입을 여는데 누구 하나 순서를 어기거나 끼어드는 법이 없다. 사려 깊은 배려와 존중하는 대화의 주인공은 빌 에반스와 폴 모티안, 그리고 스콧 라파로다.



첫 트랙 <My Foolish Heart>에서 피아노 잔향은 한지에 닿은 먹처럼 부드럽게 퍼진다. 바보 같은 마음을 고백하는 도입부 고작 여덟 마디에 쌓아 왔던 마음의 돌담이 와르르 무너진다. 영화 화양연화에서 으스러지듯 팔을 움켜쥐던 장만옥처럼 말이다. 앨범과 동명의 두 번째 트랙 <Waltz for Debby>에서 매끈한 테마 연주 뒤로 이어지는 피아노 솔로가 진솔하고 담백하다. 한껏 호응하는 스콧 라파로의 베이스와 폴 모티안의 드럼 덕에 세 박자 왈츠 리듬에 가쁜 흥이 오른다. 5번 트랙 <Some Other Time>은 5분짜리 짧은 묵상 혹은 기도다. 훗날 <Peace Piece>의 단초가 되는 간명한 도입부 멜로디를 들을 때면 비 내리는 풍경이 뿌연 흑백으로 남는다.



61년 앨범 <Waltz for Debby>는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 앨범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녹음되었다. 유난히 골똘히 연주하는 셋이 주고받는 진중한 인터플레이와 열기가 사그라지고 김 빠진 현장감이 더해져 정적인 서정과 차분한 낭만이 된다. 여기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내향적인 세 사람이 만들어낸 홀가분한 자유로움이 함께한다.


그저 셋의 앨범이다. 얕은 우울이 반가운 흐린 날 빌 에반스의 피아노가 생각나 찾아왔다가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스콧 라파로의 굵은 장대비 같은 베이스에 빠지곤 한다. 세찬 비바람 불 때면 폴 모티안의 드럼 브러시 소리가 담긴 이 앨범을 떠올리기도 한다. 다시 어김없이 상념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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