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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주밀하다

재즈를 위한 형용사 사전

by 장현석

Sarah Vaughan 사라 본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



주밀-하다 「형용사」 허술한 구석이 없고 세밀하다.



전국 5대 짬뽕 맛집, 한국 가요계 4대 보컬, 대한민국 5대 명산.


누가 어떻게 정하는지 알 길 없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순위 매기기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흔히들 재즈에 3대 여성 보컬이 있다 말한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그리고 사라 본이다. 다이나 워싱턴과 니나 시몬이 들으면 놀라 눈 커질 일이지만 종종 셋이 함께 언급된다. 실력으로 순위를 매겼을 리는 없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여성 재즈 싱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사라 본이 누구인가. 영화 ‘접속’의 OST <A Lover’s Concerto>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다들 끄덕일 테다. 언뜻 들었을 때 남성인가 싶은 탁성과 쭉쭉 내려가는 목소리, 가늠하기 힘든 풍부한 성량과 강박적인 디테일이 모여 사라 본이 된다. 그녀가 내뱉는 소리 끝자락은 공간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채우는 매캐한 연기를 닮았다. 이 정도까지 해야 되나 싶을 만큼, 깊고 외진 구석까지 부지런히 더듬는 섬세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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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앨범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은 악기에 비견되는 사라 본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빅 밴드 시대가 저물고 시작된 비밥 시대에 활동하던 그녀는 빅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보컬이 아닌, 목소리 그 자체가 하나의 악기인 보컬이었다. 6번 트랙 <Embraceable You>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자유로운 표현력을 더해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악기가 된다. 부드럽고 곧게 뻗을 땐 관악기 같은데 살짝 세게 눌러 비브라토를 표현할 땐 영락없는 현악기다. 프렛 없는 악기를 연주하듯 피치가 떨어질 땐 아련함마저 함께 구부러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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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트랙 <Lullaby of Birdland>는 그녀의 별명 Sassy와 잘 어울린다. 새침한(Sassy) 그녀는 고음을 올릴 땐 총총걸음으로 계단을 오르지만 저 아래로 떨어질 땐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내려간다. 안 그래도 따라 부르기 어려운 노래에 고난도 스캣까지 더해 사라 본 표 <Lullaby of Birdland>가 완성된다. 2번 트랙 <April in Paris> 도입부에서 “April in Paris, chestnuts in blossom...” 이라며 덤덤하게 내뱉을 때 미리 각오하는 게 좋다. 곧이어 쓰나미처럼 커다란 애수가 밀려와 덮칠 것이니까. 풍부하고 안정감 있는 바이브레이션은 마지막 하나의 디테일까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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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홀리데이에게 색소포니스트 레스터 영이 훌륭한 파트너였던 것처럼, 사라 본에게는 트럼펫 연주자 클리포드 브라운이 있었다. 특히 <Lullaby of Birdland>에서 공명하듯 대답하고 함께 연주하는 클리포드 브라운의 트럼펫은 딸을 응원하는 아버지처럼 희망적이다. 뛰어난 합이었지만 클리포드 브라운의 요절로 인해 둘이 함께한 세월은 길지 않다. 그래서일까 사라 본에게 회답하는 명품 트럼펫 솔로를 담은 <April in Paris>이 특별하다. 제목이 괜히 <Sarah Vaughan with Clifford Brown>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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