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28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무려 5년 전, 2017년이었다. 1학기에 나는 휴학을 하고 다른 전공 수업들을 청강하러 다녔다. 그 중 경영학과 수업으로는 신동엽 교수님의 '조직행동론'이라는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교수님이 <월든>이라는 책이 있다고 소개해주셨던 것이다. 그 때는 책을 잘 읽지 않던 때였기 때문에 이름만 듣고 넘어갔다. 그러다가 작년에 우연히 <월든>을 도서관에서 집어들게 되었고, 그대로 나의 인생 책이 되었던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는 <월든>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지나면 다시 봄이 올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책을 통해 여러 작가들의 사상을 탐구하고 있노라면, 문득 더없이 소박하면서 삶의 정수만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소로우의 문장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필요할 때마다 소로우가 남긴 숲 속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위하여 <월든>을 구입하였다.
<월든>은 소로우가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까지, 약 2년 2개월에 걸친 숲속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에세이이다. 내가 읽은 '은행나무' 출판사 번역본은 총 18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 '숲 속의 경제학'과 18장 '맺는 말'은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리고 2장부터 17장까지는 2년 2개월 간의 숲 속 생활을 사실적이면서도 온갖 비유를 활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월든 호수 옆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도,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도,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월든>을 펴면 나는 19세기의 전원 풍경 속에서 리기다소나무, 되강오리, 다람쥐와 들쥐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연 속의 인간이 될 수 있었다.
앞서 책의 1장과 18장이 각각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였으나, 사실 내가 가장 주의 깊게 읽은 부분이 바로 그 두 장이었다. 내가 깊은 인상을 받은 문장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90. 모든 점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나라, 즉 ‘철학자의 나라’가 있다면 동물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큰 실수는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는 과거에 없었다. 또한 가까운 장래에 생길 것 같지도 않으며, 그런 나라가 있는 게 바람직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 같으면 말이나 소를 길들여서 무엇인가 내 일을 거들 수 있도록 하숙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잘못하면 내가 마부나 목동 신세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가 덕을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갑의 이득이 을의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마구간지기 소년이 그의 주인만큼 만족을 얻을 이유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104. 인간이 자신의 탄력성을 잃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주 궁지에 빠지는가? “여보시오, 선생! 외람된 말이지만 궁지에 빠진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오?” 당신이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 뒤로 그가 소유하는 모든 것과 자신의 것이 아닌 척하는 물건들, 심지어는 부엌 가구와 그 외에 그가 계속 모아두면서 태워버리지 못하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것들에 묶인 채로 어떻게든지 앞으로 나아가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을 것이다. 자신은 옹이구멍이나 출입문을 빠져나갔지만 썰매에 실은 자신의 가구와 짐은 문턱에 걸려 나오지 못할 때 나는 그가 궁지에 빠졌다고 말한다.
119. 나는 사람의 꽃과 열매를 원한다. 나는 사람에게서 어떤 향기 같은 것이 나에게로 풍겨오기를 바라며, 우리의 교제가 잘 익은 과일의 풍미를 띠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착함’은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흘러넘치되 아무 비용도 들지 않고, 또 그가 깨닫지 못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많은 죄를 덮어주는 은전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432. 내가 호수에 관하여 관찰한 것은 인간의 심성에도 똑같이 통용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평균의 법칙인 것이다. 두 개의 지름을 이용한 그러한 규칙은 우리를 태양계 안의 태양으로 인도하고 사람 몸 안의 심장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한 사람의 매일매일의 모든 행동과 그의 삶의 물결을 뚫고 그의 작은 만과 내포에 이르는 데까지 종횡으로 선을 그을 것이며, 두 선이 만나는 곳에 그의 심성의 가장 높은 부분과 깊은 부분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소로우는 자연을 사랑했으며, 자연에서 발견되는 위대한 법칙들은 만물에 적용된다고 보았다. 즉, 인간 역시 동일한 법칙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로우만큼 자연을 관찰한 것은 아니나, 어떤 사물에 작용하는 법칙이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경우는 빈번하게 관찰했던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자연에 관한 비유나 속담이 이를 증명한다. 강한 바람에 단단한 가지는 부러지나 부드러운 풀은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것,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것, 한번 흘러간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것. 서로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현상이더라도 인간의 거대한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보면 둘은 얇고도 튼튼한 실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소로우에게는 만물이 이러한 얇은 실로 연결된 것으로 보였을까?
그가 2년 2개월 동안 마치 호수의 여인처럼 살았다. 하버드를 졸업한 수재가 인생의 가장 귀중한 시기에 모든 속세를 버리고 숲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쳤을까? 그가 숲 속으로 들어간 나이는 만 28세, 즉 현재의 나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시점이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근처 호숫가.. 예를 들어 팔당댐(호수도 아니지만 현재 생각나는 큰 물웅덩이는 팔당댐뿐이다) 근처에 집을 짓고 산다고 생각해보자. 문명과 단절된 채로 2년 동안 살 수 있을까? 각자의 몸에 맞는 옷이 있듯이, 각자의 상황에 어울리는 체험이 있는 법이다. 그 체험은 내게 소로우가 느낀 것과 같은 교훈을 전달해줄 수 있을까? 내가 만약 숲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책을 열심히 읽기 위함일 것 같다. <월든>을 읽은 이후에는 호메로스 서사시들을 읽을 계획인데, 그로부터 비롯된 서양 문학의 역사를 온몸으로 훑어내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숲에 들어가 모든 외부 자극으로부터 단절된 채로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잘 읽힐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자면 숲이 아닌 도서관에 박혀서 책을 읽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소로우는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숲으로 들어갔다.
<월든>의 군데군데 배치된 여러 구절들은 내게 수많은 생각의 단상들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하나를 다 섬세히 다루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에 천천히 해나갈 일이라고 생각한다. 180년 전에 행해진 그의 위대한 체험은 그러부터 2세기가 흐른 현재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며 이 책을 반복하여 읽을수록 내가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교훈들이 궁금해진다.